전신갑주의 말씀 끝에 바울사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서 성도들과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간구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쇠사슬에 매여 옥에 갇혀 있지만 그것 또한 복음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바울사도가 감옥에 있으니 두려워서 걱정되니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육신을 가졌으니 그것이 두렵지 않을 리는 없지만 바울사도가 자기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바울사도나 다른 사도들만의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것은 추구하는 바가 같아야 합니다. 스포츠 경기 하나만 두고 봐도 자신이 이기기를 바라는 팀이나 선수를 응원합니다. 그 선수야 당연히 이기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기고자 하는 것이 같을 때 응원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것을 추구할 때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다른 것을 추구하는데 위하여 기도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서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전하는 편지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에베소서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그 예정하신 뜻이 자기 본성이 되었기에 그 생명 안에(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사도도 그 생명 안에 있고, 다만 그 생명 안에서 장성한 자로서 이 생명에서 자라나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먼저 겪고 그것을 권면하는 글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사도와 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나 바울사도 또 모든 사도들의 육신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거지처럼 살다가 사형을 당하고, 당시 최고 신분인 로마시민권을 가진 바울사도도 옥에 갇히고 풀리기를 반복하다 죽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과 사도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적어도 그들과 삶에 대한 가치관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축복을 받고 이 땅에서는 물론이고 죽어서 천국가면(갈 수 있을지 모름)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무거운 금 면류관 쓰고 다닐 것이라고 믿는 것이 과연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삶과 궤를 같이 하는 삶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같지 않다면 바울사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세계와 가치가 다른데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물론 그 뿐 아니라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보이고 전한 삶과 가치가 다른데 그들의 복음을 아무리 믿노라 소리치고 수십 년 신학이랍시고 공부를 해도 별다른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런 것은 자기 생각에 신앙이고 하나님 믿는 것이지 하나님과 아무 상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버젓이 오늘날 정통신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도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건구해 주기를 바랐던 그 기도를 오늘 서로 중보기라며 또 축복하노라며 기도하고 서로 위하여 간구하고자 한다면 예수님과 사도들과 의와 생명과 가치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계와 의와 생명이 다른데 하나님의 의와 복과 생명을 서로를 위하여 간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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