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음행이라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영이시고 사람은 형식을 가졌으나 자신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 알 수 없다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이란 존재는 그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짝 아닌 사람과 관계하는 간음으로 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사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음 사람들에게 음행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의 개념에 입각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회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과 그 삶이 일치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럽다는 것도 비슷한 개념입니다. 더럽다는 것은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것이 함께 있게 된 상태를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아주 좋은 향수라도 깨끗한 흰옷에 쏟아지면 옷을 더럽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맞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더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돼지에게 던져진 거룩한 것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탐욕도 같은 것입니다. 탐한다는 것은 현재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탐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물건은 말할 것도 없고 성욕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탐하는 것도 같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이나 심지어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도 자신의 의지로 만든 것이 아닌데, 그 육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자기 것인 양 자기의 의지대로 채우려는 것은 탐욕인 것입니다.


누추하다는 것도 육신의 삶이 누추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천국을 가지는 것을 부유함으로 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누추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바울사도나 사도들은 비단 옷을 입고 황금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과 누추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어리석음과 희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반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것과 달리 세상의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희롱이라는 것도 어떤 사람을 지칭할 때 그 사람의 정체성과 다른 것으로 빗대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든 사람을 세상의 가치로 채워가는 것을 선하게 여기면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희롱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사람들이 희롱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는 낮아지는 법으로, 종과 죄인으로 자기 의에 가득한 사람들이 그 가치관이 죄악인 것을 알도록 섬기시는 왕이신데, 사람들은 육신의 능력을 극복하고 세상의 임금이 되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왕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기 때문에 희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우리가 일상 중에 도덕적으로 무례한 것이나, 법률적 사회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간음과 어리석음과 같은 말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합당하게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사람들이 벗어나서 세상의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법률에 의하여 죄가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예수를 믿을 덧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인데 거듭난 사람에게 바울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음행과 탐욕과 같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면 자연적으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어떤 기계들이 고장이 나면 대부분의 경우 동일 회사에서 만든 부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같은 설계 곧 같은 DNA에 기초하여 만들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세상에서 말하는 간음이나 탐욕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그것을 추구한다고 믿지 않고서는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는 말로 늘 부족하다고 합니다. 예수만 믿으면 도적질해도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는 그 사람 안에 거듭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하나님을 힘을 빌리고, 세상 사람들과 같은 파이를 다투면서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과 같이 취급하기 때문에 그런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은 새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이 세상의 법을 어기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순교와 같은 의의 충돌이 아니라 행위로 죄를 범하는 길로 자신을 이끌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거듭난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니 그에 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거룩하게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이 이 바울사도의 권면은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 그러나 자신이 거듭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고 피라미드 위를 추구하는 가치관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거듭남부터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색안경을 낀 사람과 같아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다른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힘든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보면 바울사도의 권면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그 그리스도의 사랑의 귀함을 세상 가치관에 대입해서 존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졌으니 세상이 귀한 사람을 대접하는 그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하는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세계인데 에베소서의 많은 권면들, 또 사도들의 권면들은 사실 이것이 중요한 뼈대입니다.(앞으로 이것에 대하여 많이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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