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의 미스터리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0. 30. 12:30 Writer : 김홍덕

성경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그 끝에 사람을 만드시니 다음에 에덴동산이라는 곳을 만들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그 동산에 두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에덴동산은 결국 사람의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에덴동산에는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에는 비교적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매일 어떤 것을 지었다고 하셨고, 사람의 경우 만드신 목적을 분명히 하시고 창조의 과정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 그 아내 하와는 남자의 갈비뼈를 빼서 만들었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대해서는 창세기 2장 8절에 이렇게 간단하게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창 2:8)


사람을 선악과와 함께 에덴동산에 두시므로 사람이 그곳에서 타락을 하게 되었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선악과가 있는 그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면 그 사람이 타락할 것을 몰랐을까? 몰랐다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고 하는 것이 흠집이 날것이고, 아셨다면 알면서 왜 에덴동산을 만들고 그곳에 선악과를 두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미스터리입니다. <“왜 사람이 타락할 줄 알면서 버젓이 별다른 보안 조치도 없이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에덴동산은 도무지 어디일까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쫓아내시고 다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도록 막기는 하셨지만 없애지는 않으셨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이 지구를 위성으로 다 내려다보고 있는데 도무지 어디가 에덴동산이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사방을 막으신 것도 아닙니다. 단지 동편만 막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에덴동산은 만족과 안식의 자리



에덴동산이라는 이름의 뜻은 ‘만족의 동산’이라는 뜻입니다. 조금만 풀어본다면 ‘만족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만족하며 살 수 있는 땅, 만족하는 자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실재로 아담이 범죄 전에는 아담과 하와는 아무런 걱정이 없이 에덴동산을 누비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유토피아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족할 수 있는 세상, 만족이라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니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되는 세상이 바로 유토피아고 그래서 그것이 에덴동산 곧 만족의 동산입니다.


성경에서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다음에 언급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창 2:7-8)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만족의 동산에 그 사람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족의 동산에 두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만족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너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만족의 동산을 만들어 그곳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기쁨을 표현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나오게 되니 그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만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시고 안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

안식이라는 것은 일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들 ‘놀고먹는’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만족에 대한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나니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기에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족의 동산인 에덴동산에 두셨다는 것은 사람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의 상태가 만족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께 만족스러운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사람이 창조되었고 사람이 만족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왜 선악과를 만들어 방치하셨나?



에덴동산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만족의 상태 안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에덴동산의 중앙에. 중앙에 있다는 것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만족의 상태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어렵지 않습니다.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만족하신다는 것은 그 중심에 생명이 있다는 의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선악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왜 만족의 동산이라는 에덴동산의 중앙에 두셨을까요? 사람의 타락과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이 원수 같이 되는 일의 단초를 중심에 두시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는 의미인데 이게 영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하나님은 선악과를 사람 가까이 두면 사람이 그것을 먹는다는 것을 몰랐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짓도록 함정을 파신 것은 아닌가? 와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여기서 먹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과 우리 몸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먹는 것이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사람이 먹었다는 것은 사람이 선과 악을 아는 생각과 관점과 안목과 기준이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두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다 나무입니다. 땅에 속한 생물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나무는 그 본체의 대부분의 성분이 다 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한 가지 그 씨의 이름이, 땅에 뿌려진 씨의 정체성이 나무의 이름을 정합니다. 그러니까 사과 씨를 심어 나무가 되면 그 나무의 모든 성분은 거의 심긴 땅의 토양에서 얻었음에도 그 나무의 이름을 사과나무라고 하고 그 열매를 사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만족이라는 땅에 난 나무입니다. 그 나무의 유전자, 곧 정체성은 생명과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자란 토양은 다 만족의 동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셨으니 생명이라는 것,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이 뿌리신 것입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명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그것이 땅에 심겨서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보고 “선한 선생이여!”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악한지를 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명의 주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이라고 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흙이라는 것, 땅이라는 것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주기도문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말씀인 것이 그것입니다. 에덴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만족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 곧 에덴동산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즉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사람 그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사람이 자기 삶을 만족하고 감사하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족의 동산 안에 있었다는 것은 사람이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가진 인생 그 자체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인생 자체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산이 만족스러웠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한 사람이 곧 하나님께 만족이 되셨다는 것이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인생이 만족스럽고, 감사하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감사하고 만족하는 에덴동산의 삶을 산다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의 핵심적인 요소 중에는 생명도 있고 또 선과 악을 알만한 것도 있는데 그것을 사람이 자기 의지로 자기 것을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 정체성의 일부가 되게 한다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의 어떤 부분을 사람이 자기 의지로 자기 정체성을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자기가 벗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벌거벗고 다녔는데, 딱 하나 선악과를 먹고 나니 자기가 벗었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끄럽게 생각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상태가 있다는 것이고, 그 부끄럽지 않은 상태와 부끄러운 상태를 나누는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아담에게는 벗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벗고 있다면 부끄러운 것이고, 입고 있으면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담 안에 그 기준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은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는 기준이 자기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다름이 아닌 육신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이 아담이 먹은 선악의 기준으로 보니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 안에는 육신이 부끄럽지 않은 상태에 대한 기준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그 기준에 따라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입혔습니다.





선악과를 먹어서 생긴 변화



이 모든 일은 다 육신에 대한 안목의 변화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족하신 이 육신이 졸지에 부끄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만족의 동산을 누리지 못하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제 만족은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에덴동산에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지명이, 아담이 밟고 있는 땅이 에덴동산 아니라 천국이라 해도 아담은 이제 더 이상 만족한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덴에서 쫓겨난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은 바로 <사람>입니다. 


즉 이제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육신의 삶이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 먹은(가진)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육신은 부끄러운 것이라 스스로 심판한 것입니다. 그리고 얻은 것은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땅을 가는 수고를 해야 배부른 만족을 잠시나마 누릴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흙이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즉 만족을 상실한 인생은 땅을 갈 듯이 자기 육신을 끊임없이 단련하고 육신의 수고(행함)로 먹을 것, 곧 삶의 의미를 채워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란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듯 늘 곤고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입니다. 즉 인생이 죄 가운데 빠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런 참혹한 결과는 단 하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동산 에덴 땅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바로 우리 육신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은 이 육신이 어떠함을 스스로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기준으로도 하나님께서 만족하게 여기신 육신을 가진 인생을, 또 인생의 조각이라도 선하고 악한 것으로 나누고 판단하는 본성을 너의 것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인생을 만족하는 사람의 상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드신 것이 하나님께 만족스럽고 안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육신을 가진 사람은 어떤 가치기준으로 보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만족스러운 육신을 가진 존재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가치관으로 보면 그렇게 부끄럽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스스로 인생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그 육신 가진 인생을 선과 악으로 판단해서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이 인생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시고 심히 좋으셨는데,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을 달성하기에 그렇게 만족한 존재였는데, 더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좋은 존재였는데 사람이 스스로 그 인생에 대하여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면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로 이것이 죄인 것입니다. 이 죄 하나로 세상의 모든 인생들은 그 많은 죄들(sins)을 저지르고 그래서 스스로 사람을 단련하는 각종 법을 만든 것입니다. 땅을 경작해야 먹고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저주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기준을 나누면 어떤 것은 위에 두고 어떤 것은 아래에 두며, 어떤 것은 우편에 어떤 것은 좌편에 두게 됩니다. 그렇게 피라미드를 쌓고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기준에 합당하면 위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아래로 가고 죄인이 되고 십자가에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공이라는 개념,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이긴 것과 패하고 죄인된 것을 나눈 인생들은 끊임없이 성공을 추구합니다. 하늘에 이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 가진 삶을 자기 기준으로 심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인생,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얼마든지 만족의 동산, 에덴동산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 스스로 그것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에덴동산, 만족의 동산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만족하신 사람 본연의 정체성입니다. 그 정체성은 육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육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가 바로 선악과의 문제입니다. 육신을 가졌다는 것이 인생의 핵심입니다. 에덴동산의 중앙에 선악과가 있고 생명나무가 있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육신이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살면 하나님 앞에서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 육신을 스스로 판단하면 선악과를 먹은 존재가 되어 만족할 수 없게 에덴에서 스스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미스터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셨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인생을 육신 곧 형식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는데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순종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자기 삶을 하나님께서 만족하심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에 심히 좋은 존재로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삶이 만족할 것이고 이 인생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 오늘도 하나님께 정하여 주기를 기도하고 있다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과 선악과는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에덴동산과 선악과는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 가진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인생으로 나서 자신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 인생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좇을 때에, 인생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 뜻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은 형식과 그릇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이 그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인생은 만족하고 감사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인생은 부족하니 하나님께 도움을 받아서 내 생활과 행실을 잘 연단하고 훈련해야겠다고 한다면 땅을 경작하고 있는 것이니 에덴동산에 쫓겨나서 땅을 경작하는 저주 가운데 있는 아담(인생)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같아도 이미 에덴의 동쪽이 막힌 것입니다. 성경에서 동쪽은 늘 하나님의 의가 비취는 방향입니다. 성전도 동쪽으로 열려 있고, 하나님의 의로운 빛이 동쪽에서 비친다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다른 방향은 막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비치지 않으면 어차피 에덴에 갈 수 없습니다. 인생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나 먹지 않나 보시려고 선악과를 만드신 것도 아니고, 사람이 그것을 먹을 것이라는 것을 몰라서 만드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 형상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가진 사람을 만드셨을 뿐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기 운명으로 알고 하나님만이 선하시면 자기가 이 인생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나누어 판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동쪽에서 비췸과 같이 늘 비쳐서 에덴, 곧 만족한 삶을 살 것이고,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이 육신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는 삶을 살면 스스로 에덴에서 쫓겨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에 만족도 감사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비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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