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19. 07:00 Writer : 김홍덕

아들 요셉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야곱은 그것이 족하다고 하고 죽기 전에 가서 아들 요셉을 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요셉을 보러 떠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이 애굽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이 다스리는 제국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다시는 사람이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애굽은 내려가는 곳



이러한 상황을 잘 표현한 말이 어쩌면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올라간다. 내려간다.’는 말은 위도에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 가고자 하는 장소와 출발하는 장소의 규모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한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애굽은 그 당시 주변에가 가장 큰 제국인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람인 야곱이 거하는 곳이 세상의 가치관이 다스리는 애굽보다는 훨씬 크고 높은 지역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는 것을 내려가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셨다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니 하나님의 의가 있는 곳이 높고 큰 성읍이고 도시고, 세상의 가치관이 다르시는 곳은 그 성읍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낮고 작은 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문제로 넘어 가보겠습니다. 애굽이란 하나님이 보실 때 낮은 곳이고,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인데 왜 그곳으로 자기의 사람 야곱이 내려가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교회나 신앙을 떠나서 세상의 가치관이 대접받는 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터부시하고 있고 심지어 다른 성도가 그렇게 가면 걱정이나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데 그것을 두려워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인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과 또 아비인 이삭도 다 애굽으로 내려 간 적이 있습니다. 내려간 이유도 다 같습니다. 기근 곧 흉년이 들어서 갔습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육신의 먹거리가 고갈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먹거리를 육신의 먹거리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에게 흉년이 들고 먹거리가 줄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줄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하나님의 사람을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내려가는 것과 애굽으로 올라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가는 사람이 애굽보다 높은 하나님의 의안에 있다는 것이고, 행여 애굽으로 올라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애굽으로 가는 사람이 가진 의보다 애굽의 의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의 의를 자기 왕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애굽으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내려간다는 것은 애굽의 의를 왕으로 삼는 것, 세상의 가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고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창 46:2-4)고 하신 것은 애굽에서도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야곱은 세상에 살아도 하나님의 의가 삶의 목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일을 두고 애굽에서 올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창 46:4)



신앙은 세상이란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 같은 것



많은 신앙인들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늘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 어떤 사업을 도모한다고 하면 다들 두려워하고 터부시합니다. 주일이 아니라도 세상의 가치관에 빠진 것을 심히 두려워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는 (그 교회가 평소에 주일날 돈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곳도 아닌데) 젊은 새댁들이 주일 예배를 다 마치고서 백화점에서 쇼핑한 것을 두고 세상 것을 좋아 한다며 뜨끔할 정도로 문제를 삼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기독교 신앙 안에 상당히 넓게 퍼져 있습니다. 세상과 함께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엄청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사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커지면 모여서 살려고 하고, 그런 생각은 많은 경우 사회에 대하여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을 아주 무시하고, 심해지면 모여 살면서 사회와 격리된 삶을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과 접촉하고 세상과 연관이 있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유명한 복서인 알리는 전성기에 팔로 자기 몸통을 가리지도 않고 싸웠습니다.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경계하고 터부시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려가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생명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없으니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를 지속적으로 봐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렇게 세상을 등지려고 하는 신앙은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결국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과 같습니다. 세상과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되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이란 항상 세상으로 내려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가치관 아래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는 하나님 아들의 영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고 또 다시 하나님 아들의 영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또 야곱도 그리고 요셉도 다 애굽으로 내려가거나 팔려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애굽에 내려가서 아름다운 아내로 인하여 죽게 될까봐 누이라고 속이는 일을 부자가 동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시대적 상황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교회의 시대를 맞이하고 또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정체성을 회복하는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기근이라는 것은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먹어야 사는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먹을 것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자기 본성에 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살고자 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심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어찌 보면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존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란 아버지가 가진 의가 형식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 아들인데 형식이 없고 의만 있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 안에는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당연히 그곳이 어디든 형식이 있는 세계이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큰 본성이시기도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위대한 영적 존재인 신으로 계신다는 그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세상을 또 사람을 만드셔서 그 존재의 영광을 표현하려 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 사람이, 이렇게 글을 쓰고 보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런 존재가 실존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인식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진 세계를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게 하시겠다는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형식이 없는 영적 세계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늘 하신 말씀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늘 나타나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당연히 세상이 있어야 하고, 애굽이라고 터부시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삶을 세상에서 살아내는 것이 아들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세상을 등지고 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듯 살아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저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신앙 생활하는 것, 세상과 등지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 아니고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셨지 애굽의 의를 네 주인으로 삼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서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니 선생과 같이 가르치고 모르면 책망하라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종이 되어 섬기는 법입니다. 그 섬김을 본 사람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게 하라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깨닫고 스스로 자기가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가르침을 받은 온전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예비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하셨고, 반드시 애굽에서 올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면 세상을 터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내려가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하는 것을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 속에서 세상과 분리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려가서, 그 세상을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살아내기에 충분한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니 그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보고 그 생명이 자기가 온전히 주인 삼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에 아무런 지장도 없고 두려워할 일도 경계할 일도 터부시할 일도 아님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온전히 누리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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