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요일-수요일에는 발간된 <질그릇의 선택>을, 목요일-토요일에는 <낯선 그리스도>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우연하게도 <십자가>라는 동일한 주제가 같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마 27장, 막 15장, 눅 23장, 요 19장)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옆에는 두 강도가 있었다. 예수님의 신분이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죄인인 것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한 법이 있다는 말이다. 그 법은 유대인들에게는 정의인 반면 하나님이 보실 때는 불법이다. 사람의 정체성,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게 보고 있다.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은 죄인으로 보았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아들과 그리스도로 보시는 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되레 죄인으로 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의 그 가치관을 인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들로 드러낸다. 낮은 곳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들이 가진 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낮은 곳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 낮은 자리가 십자가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유대인들과 같이 사람은 모두들 자기 옳다는 판단에 따라 행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일이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나게 하는 일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하길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오라”고 조롱함에도 내려오시지 못하는 모습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늘의 천군을 불러 잡으러 온 군사들을 물리칠 수 있음에도 끌려가신 이유나 죽은 자를 살리며 물 위를 걷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이유는 같다.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갈등이 되었지만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최종적으로 보여는 자리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반드시 육신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라는 존재 정체성 성립의 두 가지로 하나는 육신 가진 인생이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육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정체성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인 인생에게 정한 뜻이 담기고 생명이 된 존재라는 의미다. 그래서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기 때문이다. 이를 다르게,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요 하나님 아들이 곧 그리스도다. 그렇게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셔서 낮아지는 것임을 보이셨다. 


문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로 높아지고 사람 이상의 능력을 발휘해서 육신이 겪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고 여긴 것이다. 십자가와 같이 낮은 자리에 끌려가도 높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같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십자가에서 자력으로 충분히 내려오는 모습을 보이는 존재가 하나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믿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는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이 만든,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는 그리스도는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지만 낮아지는 본성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거나 벗어날 수 없는 본성을 가진 존재다. 반면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내려오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조롱했다. 사람이 믿고 보고 싶은 그리스도는 낮아지는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능력을 가진 그리스도다. 그런 그리스도여야 자신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인생이 겪는 문제, 좀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해결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오는 능력(십자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바라대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기를 바라고 예수님은 그런 분이라 믿는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길 바란다. 자신들이 낮은 자리로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의 가치로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있을 자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못한 이유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자신도 그와 같은 본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서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거듭남이고 구원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거다. 낮아지는 본성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육신과 하나가 된 존재는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던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는 이유가 자기 안에 있다. 그 이유가 자기 안에 없고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못했을까?’ 의문스러우면 거듭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 이론, 말씀은 모두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본능이 없다는 증거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게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는 질문 이후부터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로 가셨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났다. 드러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너무 초라했다. 그러나 그 초라한 모습이 그리스도의 본질이라고 십자가에 죄인이 되어 못 박힌 육신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모습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려면 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본질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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