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많은 과정을 건너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 인간의 타락에서 회복되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뜻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로 알고 그 의의 본질적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임을 아는 신앙을 가진 이들 중에서도 그런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즉 인간의 타락을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세상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러면 안 된다’는 입장에서 꾸짖듯이 복음을 전하며 이르기를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도 그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향하여 긍휼함 없이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차별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변질된 공동체 생활이다. 자신들과 다른 의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피곤하고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에다가 자신들 만의 공동체 공간을 지어서 폐쇄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 공동체 공간이 늘 열린 곳이라고 말하기도 하나, 물리적인 문이나 벽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들의 공동체가 있다고, 생명을 누리는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가서 앉아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구분되는 느낌이 드는 행태를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진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인함이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때로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함에 대하여 스스로 자신을 벌레와 같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겁도 없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벌레 같다고, 복음을 전해도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종합하여 정리를 하면 복음을 알기에 세상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무시하는 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세상을 무시한다는 것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 한다는 것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목적을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왜 사는지도 모르는 인생들과 차별된 존재라는 생각에서부터 그런 문제성 있는 태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이 가진 것이 귀할수록 자존감도 높아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더 귀해질수록 더 낮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죄인이 되어서 십자가라는 처형을 당했다. 그 이름이 예수이고 그를 믿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또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드신 뜻을 안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뜻이 바로 자신이 무엇을 가졌든지 낮아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이 법을 벗어날 수 없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존재 목적으로 아는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율법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의 법을 어겨서도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믿는 그 예수님도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는데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행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닥쳐라’는 식의 태도를 가지는 것은 어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온전한 신앙에서 변질이 생긴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 다움을 유지해야 하는데, ‘내가 내 본성대로 사는데 어쩌라고?’라는 식으로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서신서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권면한 내용이 바로 이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참고로 사도들이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며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다. 성도 혹은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존재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 생명이 생명 답게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세상에 져서 십자가를 짊으로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뜻을 보이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나서 그 본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낮게 보고, 훈계하려 하고, 적선하듯 복음을 나누어 주려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다르다. 생명 다움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변질이다.


이 신앙 변질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세상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복음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아가는 대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워낙 귀한 것을 가졌고, 또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께 성공을 기도하던 어두움을 벗어나서 밝은 눈을 가지고나서 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어리석게 보이고, 만만하게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선 줄로 아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넘어질까 조심하고 근신하는 것이 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손바닥 뒤집듯 되는 것도 아니다.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 인내라는 권면이 있고, 또 장성하기까지 자라라는 권면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를 기다리고 근신하지 못하면, 복음을 가졌기에 세상의 금융을 우습게 알고 성도들끼리 교제하는 것이 돈을 마구 쓰고, 가족이 예수를 믿지 않고 모르니 집을 나와서 자기 교회 교인들과 모여 살고, 신앙 생활을 같이 하던 성도들을 자기들과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훈계한답시고 비난하면서 심지어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타락한 신앙의 모습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