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교회의 변질 12 – 위험한 영광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8. 7. 10. 12:52 Writer : 김홍덕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본다면 가장 먼저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것을 알고 그 존재의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성이 인생의 목적임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생명의 시작이다. 이 생명조차 없이 단지 성경의 내용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적인 것을 믿고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이 객관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뜻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보이신 것과 같이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어 보는 사람이 그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 곧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이 육신으로 살면서 조성된 자아 혹은 아이덴티티에 따라 하나님의 성품은 다양하게 표현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풍성하심이다. 그래서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함에 있어 자기가 가진 특성을 통해 표현되는 복음에 있어 어떤 것이 더 주도적인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복음의 본성이 더 주가 되었는지, 아니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복음의 본성이 더 주가 되는지 라는 차이가 있다.




이는 비슷한 것 같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차이이다. 즉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을 보는 이들이 느끼는 것이 가장 크다. 예를 들면 프로야구라는 세계에서 감독은 승리하길 원하고, 또 자신이 가진 철학대로 팀을 운영한다. 여기서 이기기 원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고, 철학대로 팀과 경기를 운영하는 것을 자신의 다양성 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누구나 자기 색깔대로 경기를 이기고 우승하기 원하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는 운영이 있고, 아집이라 느끼는 운영이 있듯, 복음도 그렇다.


특히 복음이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셨듯 상대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가진 온전함을 낮추어 종이 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복음이 표현됨에 있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높이 올라가지 않으려는 것을 욕할 수는 있지만 복음의 표현됨에 있어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라는 협박이나 자신들이 가진 복음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나, 자신들이 가진 복음에 동의하지 않으면 내치는 것과 같은 것은 전혀 하나님의 본성이 아니다. 야구로 본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야구를 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깊이 알게 되는 과정에서 아주 무서운 유혹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온전히 맞춰지고 밝게 깨달으면 그 온전함이 주는 확신과 영광과 존귀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밖에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고 하심이나, 사도들이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씀한 이유까지 알게 한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이 지으신 인생으로서 더 이상의 영광이나 자랑이 아닌 것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남들에게 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 놀라움과 영광에 심취되어 복음의 본성보다 그것을 깨달은 자신과 자신이 표현하는 복음에 몰입하면서 배타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것이다. 다시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런 위험에 많은 사람들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위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재의 말씀으로 제대로 깨달은 후에나 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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