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 일에 있어서 가장 힘든 일은 어떤 것일까? 그냥 생각하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일, 곧 신앙을 가지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일지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하나님이 만든 세상의 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져야하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봐도 그렇다.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날 때는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에 그저 따라 갔다. 예수님도 조건 없이 오라고 하셨고, 제자들도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힘들어 한 고민 같은 것은 없이 따라 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는 예수님도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도 하시고. “나를 만지지 말라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말씀도 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도 십자가를 지러 가는 예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신이 제자들과 같은 고민을 해 봤는지의 반문해 봐야 한다. 성경이 괜히 제자들의 일을 기록하고 그들의 혼란과 고민이 성령이 오시므로 해소되는 사건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다. 성경은 결국 오늘 나를 위한 말씀이고, 나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은 내가 그 과정을 거쳤느냐 반추할 수 있도록 선지자와 사도와 제자들을 통해 그 여정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오늘 우리가 제자들과 같은 그 깊은 괴로움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성령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신학적 고민이나 통성기도나 금식기도 하는 간절함을 제자들의 괴로움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육신의 일, 세상의 일 그리고 교회나 예수 믿는 신앙이 세상 가치로 인정받거나 의미 있어지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하나님의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이미 천부께서 다 아시고 주신 일인데 자기 육신의 정욕에 쓰려고 구하고 매달리는 것일 뿐이다.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니 노력하는 노력의 고민이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 그리고 그와 궤를 같이 하는 크고 화려한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의와 무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의 형편이나 도모하는 일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살펴 주시며 함께 하시니 운전할 때 사고 나지 않게 잘 돌봐 주신다고 여기는 생각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흥부가 받은 박씨를 받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거듭나고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고 육신의 형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육신의 형편이나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정말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곧 육신의 삶의 형통함을 가져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그것을 담보하시는 것이 그의 사랑이자 은혜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물론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순교한 모든 이들은 다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항상 죄인이었다. 세상의 주인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육신이자 삶이 된 고귀한 존재였음에도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걸하다시피 했고 종과 같이 섬기며 수고했다. 높아지는 것을 세상의 선과 의로움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 와 보라”며 예수님께 한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이 없는 것이고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증거다.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하늘의 군사를 부를 능력이 있지만 십자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과 같이 아무리 애를 쓰도 높아지는 것을 추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반대로 하나님을 믿으니 같은 일을 해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잘 될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당연하고 좋은 믿음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없는 인생일 뿐 신앙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상 앞에 육신의 일을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상 숭배라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인생의 형편을 바꾸지 않는다. 바뀌는 것은 인생의 목적과 가치다. 그리고 목적과 가치를 추구하는 법이 바뀐다. 행위로 노력하는 법에서 생명의 법, 곧 생명이 가진 본성에 이끌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살 수밖에 없는 법 아래 거하게 된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수 없이 언급했다. 그 삶으로 거듭나기 전 가장 곤고하고 괴로운 것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는데 육신의 삶이 예수님의 가치만큼 달라지거나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이 그렇게 낯설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 여정에서 아주 어려운 과정이다.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따라 가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이다. 가려고 해도 오지 못한다고 하셨을 정도다. 그런 자리로 가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대로 따라 가려면 성령이 도우시는 것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따라서 육신이 죽을 때까지 제자들의 곤고함이 없는 신앙의 여정을 지나지 않는다면 성령을 받지 못한 인생이다. 


그러므로 아직 자신의 삶이 또 신앙이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예수님을 인하여 심히 괴로웠던 제자들과 같은 괴로움이 없다면 아직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의 임금보다 더 나은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게 세상의 가치고, 세상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낮아지는 예수를 인하여 괴롭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이 그러함을 시인해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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