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 성령충만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1. 6. 15:51 Writer : 김홍덕

생명은 나면서부터 온전하다. 그리고 자란다. 정체성은 온전하고 모든 본성이 완전히 갖추어진 존재로 태어난다. 그리고 자라면서 그 속에 내재된 본성이 자라며 충만해진다. 이것은 상식 같지만 영적으로는 중요한 견해다.


‘성령 충만’이라고 하면 성령이 강제적인 역사와 같이 생각한다. 전혀 예수에 대하여 알지 못하던 사람에게 기적적으로 성령이 임하셔서 이전에 없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 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성령의 충만 이다. 성령이 사람을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로 나게 하시는 분이시니 성령의 충만은 당연히 그 생명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잉태케 한 생명의 자라고 왕성하며 충만해지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그 속에 없는데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이 사람을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분이라는 이해와 믿음은 사실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희박한 개념이다. 정확히 그들 세계에 없는 개념이다.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기에 노력한다는 사람,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을 신학이라 명명된 학문을 익힌 사람이 더 풍성하게 가졌다는 개념을 가진 이들은 성령과 하나님의 법을 생명의 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앞서서 생명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온전하게 나는 것이지 태어나서 팔다리가 붙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거듭 날 때 이미 그 속에 충만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온전하게 나는 것이지 그것을 성경 지키는 노력으로 보완하고, 자기 안에 없기 때문에 무지한 것을 공부로 만화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에 입각한 교리에 기초를 두고 성경을 지켜서 더 온전해 질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성령이 생명이라는 개념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지켜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본성대로 살아가는 그것으로 이미 성경을 다 지키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은 그런 존재다.


성령의 충만은 것은 이와 같이 온전하게 난 생명이 자라면서 더 풍성하고 왕성하며 장성해 가는 것이다. 갓난아기보다 청년의 사람다움이 더 왕성하고 풍성하며 충만하다. 성령도 육신의 그러함과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것,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푯대를 향해 가는 삶이 충만함이다. 더 이상 주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것, 하늘의 천사를 불러 군사를 물리칠 수 있지만 육신이 된 하나님의 의가 가진 생명 본성이 주관하므로 그럴 수 없는 삶과 같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쓰도 그럴 수 없게 되는 것이 날로 많아지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이다.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생명으로 난다는 것이며 생명으로 난다는 것은 날 때부터 생명이 가진 모든 온전함을 가지고 난다는 것이다. 성령이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은 그 생명 본성이 장성해지고 왕성해지며 자라서 충만해지는 것이다. 비유는 달리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명과 본성이라는 법을 벗어나서 성령의 임하심과 충만함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형편과 형식의 변화가 아니다. 생명이 가진 본성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성령의 강림과 충만은 우리 삶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바꾸는 것이다. 당연히 형식은 내용에 종속된다. 형식은 내용의 표현이다. 본질은 내용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강림하고 그 강림한 성령이 충만해지는 사람은 삶의 형식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바뀌고 그 바뀐 목적이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더 풍성하고 충만해진다. 놀라운 것은 그것을 스스로 본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자기 삶을 이끄는 것을 자신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히 향상되고 나아지기를 바라는 육신의 형편과 삶의 질은 삶의 모습이고 표현된 현상이다. 그 삶은 아브라함, 다윗, 빌레몬, 루디아와 같이 부유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오네시모와와 같이 예수를 믿어도 종이기도 하며, 사도들과 같이 육신의 목숨을 복음 앞에 내어 놓기도 한다. 이렇듯 성령이 강림하고 충만하다고 해서 모든 삶의 형편이 사회적으로 또 세상의 가치고 높고 평안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 아니 모든 종교인들이 자기 신앙을 통하여 세상의 가치로 높고 평안한 삶을 추구하는 것에 반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삶의 형편과 형식은 이렇듯 다양하다. 다양하지 않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바람과 같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높아지는 것이 훌륭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외면하면 안 된다. 세상 가치로 높고 평안은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다가 얻어지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 생명으로 불어 넣으신 그리스도의 생명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고 예비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천부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말씀이다.


우리 삶이 다양한 것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의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 다양함 중에 어떤 것은 축복이고 어떤 것은 저주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먹은 선악의 기준에 의한 것이고 세상의 가치 기준에 의한 것이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삶의 다양함은 또한 하나님의 풍성함이다. 다양한 그 삶들 중에 사람들의 욕심과 같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어떤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축복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던 삶에서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것이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각양의 삶이 각자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 성품의 다양성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사는 인생은 거듭나면서부터 온전한 것이며 성경이 오신다고 육신의 형편이 세상의 가치로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해진다는 것은 그 생명력이 충만해진다는 의미다. 성령의 충만은 신비한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그 삶을 주관함이 풍성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