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중보자 예수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빌레몬서 Date : 2013. 4. 18. 13:43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는 Mesites라는 헬라어가 6회 정도 사용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통과하다’, 혹은 ‘서로 다투는 것을 화해시키다’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는 보통 중보자 예수, 또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뭔가를 대신해 주는 의미로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단어의 의미를 혼용한 문제만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 없이 “우리를 대신해서 ……”라고 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대신 했다고 보는 것 보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아니 그 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위와 생각과 신분으로서 인정 받으려 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이 연결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에 대하여 우리가 대응하고 순종할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고리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중보인 것이다. 이는 마치 고장 난 자동차는 주인이 타고 다니겠다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이기에 주인과 자동차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자동차가 수리가 되면 자동차와 그 주인이 다시 연결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 바울 역시, 비리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입힌 손해를 갚아주는 그런 중보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미가 있고, 그것이 바울의 본심이고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복음의 능력을 인함인 것이기에 이 중보는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이야기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 시대의 상황은 익숙하거나 피부에 와 닿는 그런 상황은 아니다. 지금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바울이 의도한 바와 같이 그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단순히 도적질한 무례한 종을 용서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 안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복음의 위대한 능력이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하늘의 뜻이고,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또한 오네시모가 다시 빌레몬에게 돌아 간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모든 육신적인 관계와 신분과 과거와 이해관계와 기억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말씀이시기도 한 것이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신분과 능력과 재물과 예의와 도덕과 같은 것들이 있을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에서 지나서 그런 것이 바로 구원의 증표라고 생각하거나, 또한 그런 것을 기준으로 교회 안에서 인정하고 인정 받는 모든 생각과 관계 안에서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할 수도 없고, 오네시모 또한 빌레몬에게 돌아갈 수 없으며, 바울 역시 그렇게 중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너와 나 서로가 사람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기준으로 만나는 어떤 관계도 온전한 관계가 아니라, 그 연결 고리가 세상에서 온 것에 기반을 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울과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 안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범죄한 오네시모를 바울이 그 주인에게 돌려 보낼 수 있고, 모두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예의와 사회적인 규례를 따른다면 오네시모는 죽을 것이나, 그렇지 않고, 돌아가서 다시 주인과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관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보내고 가고 받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가 이 모두들에게 세상에서 온 것이 서로의 관계 안에서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이루는 각 개인의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 가시관을 쓰고 발가벗겨져서 손과 발에 목 박혀 죽으심으로 세상의 어떤 사상이나 신분이나 공로로 수고하여 하나님께 이르려는 마음, 하나님이 죄로 여기시는 그 마음의 어느 것 하나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와 같은 기적과 같은 관계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때 진정한 공동체가 되고, 또한 이것이 바로 가장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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