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과 바울은 그 당시의 노예 제도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그것을 타파하려 한 사회 운동가나 혁명가는 아니다. 그런 그들이 노예라는 제도에 대하여 의를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그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우를 오네시모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오네시모를 대한다고 해서 오네시모의 신분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제도를 용납하지만 그것에 메이지 않음으로 기적과 같은 사랑의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마치 우리가 돈을 활용은 하지만 그것이 내 삶의 성과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바울과 빌레몬의 마음은 당시 종이라는 신분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 된 것이다. 우리의 육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육신은 비록 연약하고 그 안에서 늘 욕망으로 인한 악한 생각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목적 아래 수렴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 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아들이 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약하고 악한 것을 서로가 인정할 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강해지려고 하는 자리에서는 사랑이 나올 수 없지 않는가?

 

이렇듯 당시의 제도 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공동체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일으킨 주인공들의 관계가 진정한 공동체인 것이다. 성경은 그 공동체를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이 있게 되어 교회가 되고, 또한 교회는 그러한 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하나님의 공동체요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육신의 어떠한 조건이나 제도나 규율이나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남녀의 차이와 같이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온갖 세상의 것을 넘어서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는 관계가 될 때 그 관계를 비로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앞에 열거한 것과 또한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세상의 신분과 재물과 같은 그 어느 것도 신앙에 있어 의미가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때 비로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만약에 빌레몬이 ‘종이 어떻게 예수를 믿겠는가?’라고 했다면 복음이 오네시모에게 전해질 수 있었겠는가? 만의 하나 복음을 받았다고 해도 빌레몬이 교회 안에서 ‘그래도 주인과 종이라는 관계는 지켜야지’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주인을 잘 공경할수록 신앙이 좋은 것이다’라고 한다면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대의 많은 교회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교회에 복귀한는데 현수막을 별도로 걸어야 하는 것인가? 그는 오히려 지난 5년간 교회를 잘 나오지 않은 장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대통령이었다는 것 때문에 교회에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빌레몬의 마음과 비교될 수 없는 확실히 다른 마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혹은 재물의 정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그러한 것의 의미를 두는 것이고 그러한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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