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는 이 두 번째 서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안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먼저 그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과정 그 이후에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갔던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것을 간곡히 다시 설명하고 또 부탁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들의 개성이 다양한 만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모양도, 그 성장의 과정도 다양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풍성함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만 알아도 교회에서 일관된 신앙의 형태를 유지하고 추구한다는 것에서 교회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하다. 그렇듯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은 아주 다양하지만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출애굽을 기준으로 보면 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원래 백성이나 애굽과 같은 세상의 종살이를 하는 단계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세례, 곧 물세례이자 홍해를 건너는 과정이 있다. 그때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정이라 생각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과 무관하다 여기고 자기의 의를 좇아 살지만 그들의 그 의가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려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듯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하는 도화지가 된다.


그렇게 홍해를 건넌, 물세례를 받은 여정을 지나면 광야를 지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광야에서의 삶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라는 신호와 보호 아래에서만 삶이 유지되고 방향을 진행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법도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고, 또 하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길가다가 볼 수 있는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알지만 그들이 아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알기 전에 육신이 바라던 것을 이제 하나님께 구하는 것만 바뀐 여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늘 ‘무엇을 할까?(Do)’, 하는 것과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아래 있어야 육신이 생존할 수 있고, 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진행해야 자신의 길도 갈 수 있는 것과 같이, 신앙생활에서의 의와 기준이 자기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목사에게 물어보고, 그 목사들은 그것에 답하거나 그 질문을 받는 권위를 얻기 위하여 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또 기도하여 영발을 강화하는 등의 행위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가진 숨겨진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러게 무엇을 할까 하는 것을 탐구하는 목적이다.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이며, 예배는 어떤 형식으로 드려야 하는지를 궁금해 하고, 살아가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신경 쓰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일어날 불이익을 피하기 위함이고, 반대로 그것을 잘 지켜서 세상에서 혹은 그것으로 안 되면 죽어 천국에 가서 세상의 성공 기준과 같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얻으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으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대안을 가르쳐 줄 수도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알면 자랑 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이 베드로 사도가 옛 신앙이라고 하고 또한 성도들에게 심히 경계하는 신앙의 여정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 성도들이야 그런 과정을 지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번째 베드로 서신이 기록되고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우리가 읽고 묵상하는 것은 그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밝힘으로서 이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이 어떠함을 알게 하여 고백하도록 함이다.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기록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옛 신앙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교회에 다니다가 다시 이전 종교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지만 베드로 사도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바라던 것을 동일하게 바라고, 그 바라는 것을 위하여 이전에 숭배하던 것에 하던 행동과 같이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을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사람이 바라는 의와 선함과 소망이 동일한 상태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늘 육신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순교를 앞두고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기를 아주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구분하려면 그것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자기가 그 속에 있는 상태로 다른 것을 구분할 수는 없다. 사람이 자기 고집에 빠지면 남의 말은 고사하고 자기 상황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잘 구분하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자리에서 벗어나서 충분히 자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여정으로 가나안의 여정이 있다. 이는 마지막이 아니라 사실은 시작이다. 이 가나안에서의 삶을 위하여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온 것이다. 단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구원이 목적이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한 같은 것이다.


신앙의 마지막 아니 본격적인 시작인 가나안 땅의 여정은 밟는 모든 땅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땅이요 생명의 여정이다. 땅을 밟으러 다니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없고 오직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가고 서며 머무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자기 안에 그 마음이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을 표현해낼 것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밖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안에 그것에 대한 가치와 안목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자기가 그 일에 대하여 인지하고 옳다고 여기는 대로 고집하게 된다.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좋은 예이다.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귀한 줄로 모르면 그냥 돌덩이와 같이 여기듯,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그 생명이, 그 생명의 의와 비밀이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도, 교회도, 기도도, 성경도 모두 자기가 바라는 대로 취급한다. 육신의 복락을 추구하면 그 추구하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도 성경도 모두 종속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목숨을 버려가면서 전하고자 한 것이 바로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을 단지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복락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하여 의지하는 신들 중에서 급이 다른 능력자로 의지하라고 그렇게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바울 사도의 전한 것을 언급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이나 바울 사도나 모두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하고자 한 것을 서로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늘날 기독교, 혹은 그와 유사한 종교(기독교나 천주교나 다 인간의 종교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아니다.)들을 보면 교리의 조금만 달라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서로 안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안에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면, 둘 서로 안에 하나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면 서로 다르다고 할 이유는 고사하고 주장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서로가 같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성경을 보는데 서로 다른 의견들이 난무하고, 이를 바로하기 위하여 다시 더 신학으로 연구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잘못된 방법으로 잘못된 것을 더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경을 동일한 안목으로 보지 못하는 집단들과 주장하는 모든 자들이 바로 성경을 사사로이 풀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온전히 있다면 공부하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갓 태어난 병아리가 독수리를 피하는 것은 독수리의 종류와 습성과 피하는 법을 배워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본성이 되었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해본들 왜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데 왜 그러겠는가? 가나안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던가?


그러므로 성경이 풀리려면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것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이 보이고, 그 본 것이 자기 안에 들어오고, 그 들어온 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자기의 안목과 가치관과 삶이 되어 살아가다보면 그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알고, 그것으로 보게 되는 그 여정과 생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으니 성령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것보다 더 온전하게 풀리는 것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이 아니면 교황 아니라 교황 할애비라도 다 사사로이 성경을 푸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은 자기 육신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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