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을 건다고 하니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성공을 보장 받는 것이라고 여기자는 것이 아니다. 행여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떨치고 교회에서 사는 것이나,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것이나, 선교사로 사는 것이 인생을 거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인생을 살게 된 목적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그 존재 목적을 알고 존재 목적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삶을 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노라 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의외로 하나님을 대충 믿는다. 예를 들면 ‘율법’이 무엇인지 몇 십 년을 교회에 다니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설명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두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음에도 늘 모르는 것이 성경이고 신앙생활이라며 교회에 다니는 것이 그것을 대변한다.


사실 성경을 대함에 있어 지극히 상식적인 몇 가지만 온전한 눈으로 봐도 신앙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하신 말씀 앞에서 제대로 묵상만 해도 그럴 것이다. 평소에 스스로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 여기면서 성경을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임에도 그것에 대하여 탐구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남들처럼 일요일에 교회에 가고 어디 가서 도둑질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라고 여기며 묻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의 신앙이 베드로 사도가 두 번째 서신을 쓰면서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하고자 한 바가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세상에서 귀하다는 것을 얻거나 이루려고 자신의 노력으로 살거나, 아니면 다른 신이나 종교에 의지하고 있다가 하나님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이전에 바라던 것을 그대로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의 외침이었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옛 신앙>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죄와 타락이 또한 그것이다. 간음이 그것이고, 육신의 정욕이 그것이다.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 영광을 보고서 사람들이 교회로 와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한 것이고,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안락함은 복이고 선이며, 예수를 좀 더 편한 환경에서 믿게 될수록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인 것이다.


육신으로 살면서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추구하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교회에 편히 다닐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며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때로 결과나 삶의 모양이 같다고 같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며 추구하기에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도 구하던 것이다. 단지 그것을 의지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정말로 큰 착각이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예수를 대충 믿는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기적으로 들으면서도 자신이 정말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 알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반추조차 해 보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와서 헌금하고 예배드리면 된다고 하니 단지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으로 구원 받은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신앙은 단지 의지하는 신이 다를 뿐 세상의 사람들이나 자신이나 육신의 안락함을 소망하고 추구하는 육신의 정욕에 불과할 뿐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하나님께 풍요와 다산을 바라면서 행위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 하고, 무엇을 하는 것이(Do) 하나님의 뜻인지를 탐구하고, 그것을 행하므로 하나님이 아니라도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어두움과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가 오히려 미화되고, 하나님을 믿는다며 떼거지로 모여서 교회라 칭하고 교회가 나서서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크고 화려하며 비싸고 높은 것을 추구하고 가르치며, 육신의 정욕으로 바라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신다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타락했다고 그렇게 분노하시고, 사도들의 때에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옛 신앙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무엇을 하느냐에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무엇을 할 것인지는 존재만 정해지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나면 사람의 행동을 할 것이고, 개로 나면 개로 사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면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두운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났기에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고 착하게 살며 성공해서 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그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당에게 굿하며 바라던 것을 고스란히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무당이 굿하면서 바라는 것과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조차 구분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은데 어찌 하나님을 알겠는가? 이것을 모르니 무당에서 받은 부적을 몸에 지니듯 자기 육신이 바라는 바의 성취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보고, 말조심 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는 기도하는 본성이나 성령이 알게 하신 성경의 이치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에서 비롯된 것이고, 옛 신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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