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아니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일(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회사의 동료들이 일하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느라 받게 되는 불이익이나 비난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과는 다른 삶이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을 자기의 의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그 삶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다른 삶을 사는 이유가 성경을 지키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인함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큰 차이는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큰 교회(덩치가 큰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좋고 영광이라 여기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성경을 지키지 않고 게으르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억제하거나, 아니면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므로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은 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 성공률 100%가 아닙니다. 또한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틀린 것이 되기도 하고, 어떤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한 일이 되기도 하는 등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런 구멍이 숭숭 뚫린 신학적 관점이다 보니 ‘사람은 연약해서…’라는 절대적인 면피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동시에 그 조건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수고하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학문이 되고, 또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선 글들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다 듣게 되는 비난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이 옳다고 여기는 높이 올라가고, 많이 가지게 되는 것과 반대로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로 가며,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주장(하나님을 주장하는 것 역시 같은 것)하나 오히려 자가가 가진 그 옳은 의가 옳지 않은 세상의 의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지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고난은 억지로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본성에 의한 것입니다. 즉 어떤 선택을 앞에 두고서 성경이 말씀한 대로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듯 살아도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생명의 본성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낮아지고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 본성을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인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게 착각을 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세상에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을 옳다고 여기는 그 의는 예외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 제사 지내지 않는 것, 밥 먹을 때 기도하는 것과 같이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에는 절대로 양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어떻게 보면 좋은 신앙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 닥칠 손해나 위험이나 벌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이나 힘이나 권력 앞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는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끌려가신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신의 의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며 모든 술자리를 피하여 자기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은 십자가를 질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잡으러 온 군사들을 이길 힘이 없어서 잡혀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끌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정체성, 하나님에 대하여 누구보다 더 온전히 알고 있는 그 모든 것까지 버릴 수 있을 때, 그것을 버림으로 육신의 수고와 고난이 있음에도 본성에 이끌려서 그 자리로 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정리해보면 이 고난은 본성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각성한 상태에서 믿음이라 왜곡된 신념으로 선택한 어떤 선택으로 인한 손해나 곤고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을 좇아 살다보니 낮아지고, 하나님의 의조차 버려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내는 삶을 사는 그것이 베드로 사도가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이 고난은 육신으로 사는 동안 고난을 당하고 죽어서 천국에서 보상 받는 그런 시험이나 테스트가 아닙니다. 이 고난은 그 자체가 감사함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바보 같고 어리석고 괜히 힘들게 사는데 그것을 감사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낮아지는 것을 영광으로 알 수 있는 생명의 안목이 있기에 그것을 감사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고난은 영광을 얻기 위한 시험이나 테스나 자격 검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 인생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아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보면 고난과 같은 것입니다. 육신을 수고하고 십자가에 드리기까지 하니 분명한 고난이기는 하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이것을 평안과 영광으로 아는 것도 그것을 평안과 영광으로 보는 안목을 가진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썩은 고기가 늑대라는 생명에게는 양식으로 보이지만 양은 피하는 것이 되는 것은 생명이 다르기 때문임과 같습니다.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광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을 받고 그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강함이며 영광이며 온전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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