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삶이요, 장로의 삶인 양을 치고 먹이는 것은 어미새가 먹이를 구해 와서 새끼들에게 나누어주듯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그 육신 가진 삶의 목적을 알아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자기 삶의 목적인 것을 깨닫도록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고 있는 양을 치라는 것의 정의입니다. 


이것은 사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성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 부득이하게 하는 것이 아니며, 이익이 관심도 아니며, 주장하듯 하지도 않는 본성을 가졌기에 그 본성을 인하여 양을 치고 먹이려 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생명의 본성을 인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을 인한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다양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이며, 예수는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는 것에서 우리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것에서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벗어난 것이 없다는 것은 이것 이외에 도덕이나 윤리나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과 같은 장로들에게 양들의 본이 되라고 하면서 그러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단순하게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재림하실 때에 영광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반만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은 구름타고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없던 사람에게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잉태되고 거듭나서 고백으로 나타나는 것이 먼저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양을 먹이면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니,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육신의 안목으로 이 말씀을 보고서 생각하기를 ‘양을 먹이는 일을 잘 하면 그 보상으로 면류관을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언뜻 이것은 맞는 말 같지만 성경을 이렇게 보는 관점이 바로 행위로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양을 먹인 공로가 있고, 그것에 대한 보상이 있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나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지금 고생하지만 나중에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은 육신으로 현현(顯現)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나타나심’은 마치 우리가 아이들을 보면서 그 얼굴에서 그 부모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이 나타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시는 것도 나타나시는 것이지만 그런 모습 역시 예수님이 보이신 정체성이 나타나는 것의 한 보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아야 양을 먹이는 것과 예수님의 나타나심과 면류관을 얻는 것이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수고에 대한 공로로 보는 육신의 안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의 맥락에 맞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성경에서 공로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면류관, 곧 영광스러움이 천국에서 금으로 된 기와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 그 자체가 영광이요 면류관으로 아는 사람이어야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면류관이라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은 세상에서 칭송을 받는 것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성경대로 되데 그 일로 인하여 세상의 사람들, 육신의 정욕에 뿌리를 둔 육신의 안목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영광은 그것이 어떤 세계이든(신앙의 세계라고 해도)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면 면류관을 준다고 하면, 더 많은 양을 먹이거나, 양을 잘 먹인 사람들은 더 좋은 면류관을 준다는 식의 사고가 당연하고,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What to do?)’ 더 좋은 면류관을 얻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런 생각은 당연히 행위의 공로를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로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워지는 것이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면류관도 행위나 공로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면류관이고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어야 영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우승자의 영광은 ‘그냥 그런가보다.’ 이상이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임을 앞서 이야기 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목적과 주권을 가졌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신약이든 구약이든 성경을 행위로 지키려 했던 사람이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며, 육신을 보전하고 평안케 하는 것을 인생의 복으로 알던 사람이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임을 알게 되는 그 순간, 그 고백이 있는 그 때, 그 상황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어야 예수님이 주시는 면류관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영광스럽다는 것을 알며, 그것이 시들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이 나타나는 그것이 바로 영광이며, 면류관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영광스럽게 아는 것입니다. 행위로, 양을 먹인 공로로 면류관을 얻는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정체성으로 나타나시는 예수님이 절대로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습니다. 만의 하나 그럴 수 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