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11-12) 육신의 정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2. 27. 08:35 Writer : 김홍덕

육신의 정욕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육신이 가진 성적인 욕망, 그리고 육신이 가진 각종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욕망들은 이기적인 행위로 나타나서 세상이 흔히 말하는 죄를 범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람이 가진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욕망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절대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각과 판단에서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떨어진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물을 위로 올리는 펌프의 존재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 물이 자연적으로 위로 흐른다면 굳이 펌프가 필요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과 근원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 인간보다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신(다른 신도 없지만)보다 선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결정, 모든 판단, 모든 이해에 앞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은 절대적 명제로 놓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절대적으로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 안에 주신 욕망과 본성들은 악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니 선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가진 본성과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게 여기고 믿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사람이 가진 욕망이 선하니 그것을 맘대로 표현하고 살라고 말씀한다는 것인가?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욕망을 주셨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있는 것일 텐데 그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이 주신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욕망대로 아무 이성과 가리지 않고 잠자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주 제대로 하나님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단지 우리 인생들 보다 더 선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가 곧 선이라는 이 절대적인 가이드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지고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각종 본능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위함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어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어디서 하나님이 주신 본성으로 자신이 가진 의를 이루려고 살다가 그 모습을 보고서 인생이 가진 본능을 부정하게 여기는 패역한 생각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욕망은 하나의 수단이고 표현 방법입니다.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욕망으로 무엇을 바라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욕망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고, 그 바라는 것에 대한 욕망이 그것입니다. 욕망은 대상이 있는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성욕이 없다는 것은 이성을 봐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 이성에게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중이나 신부나 수녀는 사람에게 정욕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할 뿐 자신들이 정욕을 이긴 성스러운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정말로 성욕이 없다면 사회 속에 같이 살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고 그래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어떤 욕망은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 욕망이 우리 존재의 목적을 벗어날 때 부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칼이 부엌에서 요리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범죄에 사용되는 것이 바로 부정한 것입니다. 칼이 날카롭다는 것 자체는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진 성욕이나 욕심이나 열정도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 안에서, 목적대로 사용되면 그것은 선한 것입니다.


인생이 가진 욕심을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에 사용하면 선한 것이나 하나님을 표현하느라 소비하라고 주신 육신의 평안을 얻는 것을 욕심낼 때 부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욕도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로서 그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이어갈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낳기 위한 것을 위함이라면 선한 것이나, 자기 눈에 보이는 예쁜 여자를 취했으면 하는 욕심으로 사용하면 부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나 성욕이나 그렇듯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하면 선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다르게 사용하게 될 때 부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바 영혼을 거스르는 육신의 정욕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혼을 거스른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라는 것은 본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의로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한 영혼, 정욕에 맞서고 세상과 맞서며 갈등하는 영혼은 바로 그런 영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영혼’ 역시 같은 것입니다. 즉 여기에 나오는 육신의 정욕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의로움에 맞서는 욕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앞선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람이 인생을 가지지 못한 부정한 존재로 보고서 그 가지지 못한 것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살 때 이를 육신의 정욕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잉ㄹ회용 육신을 주신 것은 이를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소비하라고 주신 것인데 사람들은 육신을 평안하게 하고 남들보다 육신을 덜 사용하며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복이라 여기고 이를 추구하는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는 본질이 아니라고,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육신의 눈이, 세상의 가치 기준에 의한 안목이 본질로 보고 귀하게 여기는 각양의 세상 가치, 물질과 권력과 같은 것을 가지는 것이 곧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런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어떻게 행동하면 될까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이 극에 달한 패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이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놀랍고도 심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거룩하다 여기는데 이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인생이 가진 육신의 본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본능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지으신 뜻대로 사용되면 선하고 선한 것입니다. 감사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신 본능, 무엇보다 이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지도 않고, 육신을 소비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을 가치고 여겨 탐하고 추구하며,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고 안락하게 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성공이라 여기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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