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1-10) 이전과 다른 삶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2. 22. 07:34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새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었다고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니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생명이었는데 이제는 산 생명이 되는 것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새로워지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삶을 거듭나게 또 새롭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는 곧 달라진 삶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새롭게 한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자신의 가치로 알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나서는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자신의 가치로 알고 살아가야 비로소 새롭게 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이나 알고 나서나 모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알고, 육신의 복락을 복으로 안다면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새롭게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정의감 역시 자신이 알던 도덕과 정의를 바탕으로 사회 정의를 부르짖다 하나님을 알고 나서는 성경을 인용해서 같은 사회에 단지 성경을 바탕으로 이전과 동일한 것을 요구하고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어 새롭게 된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새롭게 되었다면 사회 정의의 개념이 바뀔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인하여 변화된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착각 속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서 새롭게 되었다면 하나님을 알기 전에 귀하게 여긴 것이 이제는 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오히려 더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하나님을 알고 나서도 동일하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귀한 것인데 단지 그것이 이전에는 자신에게 영광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교묘함으로 회 칠을 한 상태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새롭게 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청소된 곳에 더 많은 귀신이 거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버린 돌을 이야기 했습니다. 건축자 곧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건축자가 볼 때는 쓸모없어 보이는 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에 대한 많은 주장과 이론이 있는 중에 예수님께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와서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응당 지킬 것이라는 것들을 폐하시면서 초라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서는 건축자가 버리듯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과 같은 사람의 온전한 모습이었기에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모습은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살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님을 살려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으로 볼 때 본능적인 조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그 버린 돌이 이제는 귀하게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를 받는 고난을 받는 성도들에게 ‘너희도’ 이제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가 이제는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긴다고 말한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그것을 위하게 여기는 사람이고, 또 버린 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알 수 있는 안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버린 돌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귀하게 여깁니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찬송 부르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최소한 예수님을 성자라 부르며 존경하고 분류하는 정도로 귀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또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라서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세상 사람들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겨루는데 있어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이나 믿은 다음이나 바라는 것은 동일하게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신의 복락과 안위인데 단지 그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한다고 이전과 다른 삶이 되었다고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전과 달라졌다면 달라지는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유와 목적이 다른데 동일한 것을 추구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썩은 고기를 먹이로 알던 늑대가 양으로 거듭났는데 계속 썩은 고기를 먹으려 한다면 그것이 거듭난 것입니까? 이전에는 포악하게 고기를 잡아먹었지만 이제는 부드럽고 순하게 고기를 먹는다고 달라진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듯 하나님을 믿어 새롭게 된다면 이전에 귀한 것이 이제는 귀하게 여기려 해도 귀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건축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은 모두가 높아지고 성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낮아지고 자신의 육신을 수고로움에 내어 주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려 하는 것이 도무지 귀하지 않아서 버린 것입니다. 모두가 세상에서 육신의 삶이 대접 받고 육신이 더 평안해 지는 것은 높은 곳 곧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창녀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났는데 교회를 더 크게 지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서 교회에 올 것이라고 믿으며 또 기왕이면 큰 교회에 가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새롭게 거듭났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교회가 작다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렇게 되기를 꿈꾸니 다 큰 교회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세상에서 성공하면 자신의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 믿는 사람이나 또 그것을 보고 교회에 가겠다는 사람이나 예수 믿어서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적어도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은 이전에는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했다면 이제는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실패하고 초라한 사람이 되는 것이 오히려 귀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높은 곳에 오르려 했지만 이제는 낮아지고 자신의 육신을 수고하는 종의 자리에 두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드리는 것이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는 높은 곳을 향하던 사람이 이제는 낮은 곳을 향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이 평안할수록 복을 받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세상의 가치를 의롭게 여기는 자들의 주장 앞에 자신이 죄인이 되어도 자신의 육신을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드려 수고하는 낮은 자리에서 사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이전과 다른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어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적어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안에는 성공한 것을 볼 때 부러워하는 것이 있는데 이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입니다. 야구라는 종목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누가 우승한 것을 보면 좋겠다고 하겠지만 그건 자기 안에 욕망이 좋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것을 세상이 좋다고 하니 말하는 립서비스일 뿐입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좋은 차와 집을 가진 친구나 사람을 볼 때 그 이상의 마음은 가지려 해도 가져지지 않는 본성이 되었을 때,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 이전과 전혀 다른 거듭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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