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과 같이 너희도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성도들과 달리 예수님의 정체성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히는 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이것을 해도 되는지 염려하는 사람들의 일이라고 지난번에 이야기 했습니다. 


살아가는 순간순간 이래도 되는지를 염려한다는 것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려한다는 것 자체가 걸려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는데 성경 말씀대로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일일이 걱정해야 한다는 것은 자유가 아니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삶을 어두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할 일을 두고 성경에 맞는 삶인지 아닌지를 걱정한다는 것은 일단 그 결정에 관하여 성경이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손으로 더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성경에 대하여 밝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면, 그게 궁금할 이유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자신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듯 성경 말씀이 늘 솟아나는 사람은 단언컨대 살아가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운전하는 법이 자기 안에 없을 때는 운전이 무섭고 걱정거리지만 운전하는 법이 자기 안에 있으면 어떻게 할지 궁금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 그 본성대로 살면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니 순간순간 궁금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자주 말씀하시는 어두움은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소경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이 안과적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인생들이 자기가 사는 목적을 알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고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인생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인생의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을 몰라서 나타난 현상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위로 향하는 것입니다. 위로 향한다고 하니 원래 그곳이 위쪽인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우주만 봐도 지구가 둥그니까 남반구이 사람과 북반구의 사람들에게 위는 반대인 것 같이 사람들이 인생에서 성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원래 높고 영광스럽고 성공인 것 같고 예수를 믿으면 그 반대로 가는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장님들이 정한 법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눈 뜬 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높다고 여기는 것, 예수님을 버린 돌로 여기는 그 가치기준과 세상에서 성공하면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들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야 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 것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 제쳐두고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하나님이 옳다는 것이 실은 높은 것이고 선하고 옳은 것입니다. 이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진 기준, 곧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겨 세상에서 높이 오르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세상에서 영광을 취하려는 것을 하나님께서 도우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벨탑이었고, 그 바벨탑의 후예들이 오늘날 방송에서 상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정말로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인생이 평안한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생이 평안하지 않는 것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평안하다는 사람들은 그 평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삶을 삽니다. 이는 모두가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평안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수고하고 괴로운 것 같지만 내면이 평안합니다. 인생의 본질이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정말로 인생이라는 것이 육신이 평안한 것이 복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이 죽지 않고 살면 살수록 더 쌩쌩해지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만드실 때 주신 이 육신은 소비재와 같이 갈수록 쇠잔하여지도록 만드셨습니다. 지혜가 있다면 이 육신의 삶이 갈수록 병약해진다는 것 그 하나에서도 인생의 성공이 육신의 평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는 어두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서 자신들이 만들지도 않은 세상의 법을 만들었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영광스럽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이긴 자가 독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두운 자들의 행사입니다. 더욱이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자기 맘대로 정의하고, 자기 맘대로 하려는 죄 중의 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어두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내셨는데 그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에서 불러내셔서 기이한 빛으로 인도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기이한 빛은 하나님의 밝음인데 이것이 기이한 것은 이전에 가진 안목으로 볼 때, ‘그게 된다고?’ 싶은데 되는 세계의 밝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에는 절대로 낮아져서는 영광스럽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는 육신이 수고하는 것은 종이나 하는 짓이니 성공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들은 졸이 발을 씻겨 주는 자리에 있는 것이 온전한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로 오니 그와 반대로 육신이 수고할수록 십자가를 지는 영광의 삶이고, 발을 씻기는 것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놀라운 기이함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처음에는 의아하고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하나님 아들이 그 꼬라지로 있어서 되겠는가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그렇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종과 같이 수고하고 십자가에 내어주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밝음은 모든 것을 다 설명합니다. 밝아지면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의문스러운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인생을 왜 사는지, 왜 사람의 육신은 연약한지, 또 인생은 왜 영원히 살지 못하는지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가진 모든 철학적 종교적인 질문과 회의를 설명할 수 있어야 밝은 것입니다. 노력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다 기만과 술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어야 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노라면 누군가 수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으면 자기가 옳다고 여겨 종을 두고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자들의 주장 앞에 육신으로 수고하므로 종이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기이할 뿐 아니라 어리석은 것 같아서 건축가 버릴 수밖에 없지만 놀랍게도 그 어리석은 모습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세상의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신 자리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건축자가 볼 때는 버려야 할 쓸모없는 돌과 같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영광이며 그런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볼 때는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할 것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고 낮은 자리로 가서 의인임에도 죄인을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는 삶을 사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운 덕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전하시고자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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