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에게 돌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돌에 새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돌로 쳐 죽이라는 형벌이 있습니다. 법에 의한 사형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돌이 유대인들에게 법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무관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를 비롯한 성경의 수신자가 유대인이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자신의 이야기로 읽는 수신자라면 역시 돌이라는 것이 율법과 같은 법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앞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성전의 모퉁이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법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구원을 이루는 삶이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어리석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삶을 성전의 주춧돌과 같이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베드로전서 전반에 흐르는 성도들의 삶이 받는 고난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을 마치신 다음에 시험을 받으실 때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는 시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율법을 몸으로 지켜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요구사항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지켜내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은 돌에 새긴 율법을 사람이 그대로 소화해 내라는 것입니다. 즉 문자 그대로 지켜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는 유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은 그렇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 것이라고 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표현한 것인데 이는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인데, 이는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육신의 삶이 된 사람에게서 표현된 말과 삶을 볼 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돌에 새긴 율법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돌을 먹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지켜내는 것에 있어 그 방향이 말씀을 지켜 의롭게 된다는 <밖에서 안으로>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는 사람이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돌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돌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이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다는 방향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산 돌>이라는 것입니다. 돌은 산 것이 아닌데 살아 있는 돌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돌, 곧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부딪히는 돌과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가 말한 돌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과 같이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돌의 문제는 성경에서 아주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입니다. 바로 율법과 복음의 문제입니다. 돌은 율법이기도 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상징이기도 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부딪히는 돌,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는 돌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과 같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이 되기도 하는 산 돌과 같은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돌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두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같은 말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는 사람은 돌과 같이 보는 것입니다. 문자나 돌이나 물체이고 우리가 먹는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씀과 문자를 볼 때 그 의미하는 바, 그 뜻하는 바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인데 이렇게 다른 두 가지 관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떤 이에게는 부딪히고 걸림이 되고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반석이 된다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행위로 지켜내려 하고 그로 인하여 의롭게 되려는 사람에게는 성경말씀이 늘 부딪히는 돌과 같이 다가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내는 것은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끼우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을 밖에서 안으로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그 속에서부터 밖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그 부모가 살을 붙여 몸을 불리고, 잡아 당겨서 키 큰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법이기 때문에 속에서부터 밖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단지 표현할 수 있는 말씀이 사람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는 사람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바 된 것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요한 일서 1장)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안에 이미지(형상)로 들어가서 그것에 순종할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것이 생명이 되어 거듭난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의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과 같이 표현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온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이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 안에 이미지로 들어가서 그것에 순종되고 동의 되므로 동일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된 것을 기록하니 성경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니 성경이 된 것이듯.


따라서 이 예수님의 법과 같이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그 말씀이 자신을 거듭난 생명이 되게 하여 그 말씀이 자기 육신으로 표현되는 삶을 사는 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할 나위 없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을 볼 때 자기가 아닌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되어 그것이 자기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을 보노라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시고 보이신 것과 같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될 것이니 그것을 보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도무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이 반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1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속에서 생수가 넘치는 사람이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본성을 자신도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살아가는데 이것을 부인할 법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세계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비밀과 같은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으로 지켜내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와 법과는 반대로 살아가니 하나님의 말씀이 시시때때로 걸림이 될 것입니다. 살면서 무엇 하나할 때 마다 성경 말씀이 생각나서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말씀이 부딪히는 돌이 된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늘 교회에 가서 묻는 질문이 무엇을 해도(Do) 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행동 할 때마다 성경 말씀이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에 새겨졌지만 돌과 같이 경직되고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돌에 새겼던 물에 새겼던 그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자기 것으로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돌에 새겨져도 살아 있는 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육신으로 지켜내려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이래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달고 사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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