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의 꿈과 그리스도의 은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0. 28. 14:36 Writer : 김홍덕

술 맡은 관원장이 복권이 되었지만 복권이 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한 요셉을 까맣게 잊고 살던 어느 날, 바로 왕이 연이어 같은 꿈을 꾸었는데 그 뜻을 알지 못하여 근심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일을 바로에게 고하매 바로가 요셉을 불러 자신의 꿈을 해석해 달라고 명하게 됩니다.


바로의 꿈은 이러했습니다. 하숫가(나일 강)에서 살지고 아름다운 암소 일곱 마리가 나와서 풀을 뜯고 있는데 잠시 후에 파리하고 흉악한 암소 일곱이 나와서 살지고 아름다운 소를 먹었지만 그 파리하고 흉악한 모습에 변화가 없었다는 것과, 한 줄기에 무성하고 풍성한 일곱 이삭이 나고 잠시 후에는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이삭 일곱이 나와 무성하고 풍성한 이삭을 삼켰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어릴 적 교회학교를 좀 다녔다면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냥 성경을, 교회를 좀 접했다면 그 스토리는 다 아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꿈의 해석은 앞으로 칠년간은 애굽에 풍년이 들었다가 그 이후에 흉년이 들 텐데 이전 풍년의 풍성함이 이후 흉년으로 인하여 무색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요셉은 바로에게 지혜로운 자를 뽑아 온 칠년간의 풍년 때에 그 소출의 1/5를 거두어 온 애굽에 저장하여 흉년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를 하게 되고, 그 일을 감당할 사람으로 요셉이 임명되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 말씀은 인생역전의 사건으로 회자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 안에서 도덕적이고 바른 삶과 신앙적 규례를 지키면 언젠가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설교를 할 때 이만한 본문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요셉과 같이 신앙과 행실에 지조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그 도우심은 결국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듯 인생에서 꿈꾸던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쓴 사건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관 안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주실 지를 요셉에게 배우라고 쓴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요셉의 이야기 뿐 아니라 성경말씀 전체에 흐르는 말씀의 주제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이 인생역전에 관한 말씀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분명히 성경의 안목과 다른 안목으로 성경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셉은 지속적으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므로 그 아비와 가족들을 만나게 되고, 그 아비 이스라엘(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큰 민족 곧 하나님 백성의 나라가 되는 연결고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과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곧 교회로 이어지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가진 의미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이 왜 성경에 있으며,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어떻게 우리의 이야기로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생각해 보려면 지금 이 말씀은 야곱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속한 말씀이고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본질적 주제는 하나님 나라, 곧 이 시대로 본다면 온전한 교회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꿈은 애굽 왕 바로의 꿈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꿈은 하나님의 의를 자기 의로 삼는 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 아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이 해몽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법칙은 이런 것입니다. 육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이긴 자 일수록 피라미드의 꼭대로 향하는 법칙입니다. 이것은 이긴 자가 선하고 의로운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인생이란 바로 이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되고 패배한 자라는 것을 인정할 때 의로워지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라 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이 교회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기준으로 성공해 보려고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왜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서게 되고 그때 답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애굽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에서 실패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질문에 서는 것조차 기회를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아니 자기 의에 빠져거 그런 것을 생각해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애굽의 강 나일에서 올라온 살지고 아름다운 암소들의 풍성함과 같은 세월을 보내다가 그 모든 풍성함을 다 삼키고도 모자랄 정도의 시련을 겪게 되면 이는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요셉이 해몽하기를 그런 흉년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 애굽의 힘, 애굽 안에 있는 것, 즉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그 가난함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그것이 아니라도 사람은 늘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사람이 달리 빈 그릇이 아닙니다. 그런데 애굽의 젓줄인 나일에서 올라오는 것들이 결국 채워주지 못하는 배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배고픔을 이기려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요셉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의 세계에서 채우지 못하는 사람의 심령의 가난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교회에 가서 구하는 것이 다 세상의 것을 구합니다.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겠지만 구하는 것을 얻게 되었을 때 누가 이익인가를 살피면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 이익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서 ‘하나님을 믿으면 저렇게 삶이 윤택하여 지는구나!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며 하나님을 속이려 합니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불러오고 모여든 사람들도 역시 육신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동일한 이유로 구합니다. 심지어 멀리 외국에 가서 선교한다고 전하는 것도 같습니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전도해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어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서 잘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니 모두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애굽의 세계에서 의로운 것입니다. 다산과 풍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알과 아세라 취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일에서 올라온 살지고 아름다운 소와 같이 애굽의 세계에 대하여 풍요한 삶을 누림으로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그것에 있는 것과 같아 보여도 역시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곤고한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당하려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말씀만이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