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믿음에 대하여 또 하나 잘못 생각하는 것은 믿음에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경에 있는 사건과 말씀이 실존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비단 어릴 적 이야기만은 아니겠지만 학창 시절 간혹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들을 수 있었던 반문이 바로 “증거 있냐?”였다.


그런 시절에 NASA의 계산에 의하면 지구가 하루 정도 부족 하며 그것은 계산으로 풀 수 없어서 성경을 보니 히스기야의 일과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받쳐서 해가 지지 않아 전쟁을 이긴 것을 합하면 하루 정도가 되니 그 증거라는 떠도는 말에 흥분하기도 했다. 또 인공위성으로 노아의 방주를 찾는다고 하는 등 성경의 기적들의 증거를 찾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주 많다. 아예 그것을 연구하기 위한 ‘창조과학회’라고 단체를 만들어 연구하기까지 한다.


객관적 증거가 없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성경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객관적 사실로서 기적을 보지 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것이다.


그와 같이 지금도 사람들은 성경을 객관적 사실로 증명하고 증거를 찾아서 믿으려 한다. 하지만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이미 믿지 않는 것이다. 창조과학회나 고고학적 고찰을 통해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 확신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을 증명하려고 수고하는 바보는 없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그 상황을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이탈하거나 음모론을 꾸미고 반박하는 증거들이 넘쳐나고 종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이단적 행태를 보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은 하늘에서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먹을 것, 입을 것을 해결해줄 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이 오셨을 때 증명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오셨는데 사람들의 기대는 자기 육신의 문제뿐이었다. 그때 오신 예수님을 매개로 수 없는 이단과 우상들을 만들었다. 그 신들이나 신앙이나 종교 또 믿음이 다양한 것 같지만 사실상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의지하는 것 하나뿐이다. 사람들이 찾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객관적 증거도 결국 자기 육신의 정욕에 쓸 것을 충족시켜 주면 객관적 증거가 되고, 그것이 아니면 객관적 증거가 깔려 죽을 만큼 많아도 믿는 것에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어떤 신을 믿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는 신을 원하지 신의 뜻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것에 삶을 내어놓으라는 것에 순종하지 않는다. 종교적 전쟁에서 폭탄테러를 하는 것 같은 일도 그렇게 죽으면 다음 생에 혹은 천국에서 많은 보상이 담보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객관적인 증거가 없어 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이 수동적이지 않기 때문에 증거가 넘쳐나도 자기 기준의 증거가 아니니 증거로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온 천지가 하나님 존재의 증거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 증거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증거는 믿음 그 자체가 증거다.


결국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모든 것이 증거가 되지만 그 의가 없으면 어떤 증거도 소용없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약속이다. 증거와 믿음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를 받은 믿음, 약속을 받은 믿음이라는 말씀으로 설명한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히 11:39)


증거와 약속은 선후 관계가 있다. 선후 관계에 있어 먼저는 약속이다. 증거는 약속이 표현되고 나타난 것이지 본질이 아니다. 사실 믿음장이 있는 히브리서에서는 1장 초반부터 약속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이 약속은 손가락 걸고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약속은 창조주가 정한다. 상호 간에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이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을 떠나 ‘약속’한 땅으로 가라고 할 때 그 땅에 대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약속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땅이 어딘지도 말씀하지 않았다. 그런데 약속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목적을 가진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설계하는 사람의 설계 내용이 자동차에게 약속이 된다. 설계자가 구현하려고 하는 정체성과 기능의 계획이 자동차로 나타나 약속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약속이다. 그리고 증거는 바로 자동차다. 자동차가 시판되는 순간 그 자동차의 설계도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설계한 사람의 철학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증거다. 설계자의 약속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약속과 증거의 관계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뜻이 사람의 모든 능력과 본성을 정했고 그것이 사람에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있음을 사람에게 약속하셨다.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약속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이루어지고 사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약속의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거듭난 사람이 바로 증거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증거는 약속이 나타난 것이지만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바로 약속이다. 그래서 증거를 받은 많은 순교자의 믿음보다 약속을 받은 믿음이 더 크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것은 증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증거로 나타난 본질을 믿는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상이 믿음의 본질이란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로, 또 사람으로 나타난 본질인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임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의가 나를 주관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나를 주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그 생명이 주는 안목으로 보면 나타난 세상의 모든 것이 증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할 증거는 결국 증거를 증거로 볼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 보인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그 안에 약속이 있는 것이고, 그 약속이 있는 사람의 삶이 약속의 증거다. 사람이 순종한 하나님의 의가 증거의 본질이고, 모든 나타난 것의 본질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없이 객관적인 증거를 찾는 사람들, 그들이 증거를 찾는 곳이 바로 나타난 세계다. 자기 자신 안에 약속의 믿음이 있고, 그것이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실존의 증거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없는 사람은 약속이 생명이 되는 과정을 모르니 건너뛰고 단지 나타난 것에서 증거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에 약속이 없으므로 증거를 증거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 님의 말씀과 의와 믿음이 아닌 세상의 과학과 논리로 하나님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실존과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증거다. 그 믿음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 님의 의로 말미암아 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증거 그자체라는 말씀이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믿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실존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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