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7:7-13) 엎드러진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1. 9. 09:31 Writer : 김홍덕

앞선 말씀에서 미가 선지자는 혈육들이 서로를 원수와 같이 여기게 된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혈육이 가진 존재 정체성으로 서로를 대하지 않고 행위로서 서로를 대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서로를 대함에 있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을 기반으로 대하면 참다운 신뢰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신뢰는 유리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 간에 일어나는 갈등이 있을 때 그것을 성토하는 말에는 거의 예외 없이 “어떻게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럴 수(Do) 있느냐?”가 들어 있습니다.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할 때도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의 평소 인격이나 사람됨을 기준으로 ‘뭔가 뜻이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인데, 단지 행동에 주목하고 그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문제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실수도 없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경영하시는 분이라는 그 정체성 하나만 제대로 믿고 있어도 삶이 근원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달라질 것입니다. 뭘 해 달라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달라는 것조차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 알아서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니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일면 아주 거룩한 것 같지만 한 편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무엇이 좋은 일인지도 모르는 치매 걸린 노인과 같으니 자신이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무엇이 자신에게 영광이 되는지를 모를 리 없고, 행하실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의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 그 하나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대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으로 통하여 나타나도록 순종하는 것, 그 하나 외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에 가서 나무뿌리를 뽑을 듯이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의 기름을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크고 화려하고 비싼 재료로 지은 교회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그런 성공을 거두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정체성 그 하나를 믿고 그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에 자기 육신의 삶을 순종하는 그 하나를 원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대할 때도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 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기적이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표적을 보여야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다보니 잎이 무성하지만 과실 하나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렇게 믿으니 사람도 당연히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가 가진 가치관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혈육을 대할 때마저도 행위로 판단하다 보니 원수가 되는데 바로 그런 가치관이 세상에서 온 가치관이고,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선지자들이 늘 이것을 경고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이 재앙이라고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진 그 가치관을 인하여 십자가의 삶이 나타나는 놀라운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의 성공이다 실패다 가늠하는 기준은 그 가치관에 종속된 것입니다. 행위로 판단하는 자들, 하나님께서 어떤 표적을 행하심이 있으면 하나님이 있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지고 엎드러진 것과 일어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명하게 표현하신 성경이 바로 욥기입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 그 하나로 빌닷과 소발과 엘리바스라는 요즘 말로 절친들이 하나님께 욥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하신 것은 욥이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행동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닦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여기는 곳 역시 그런 가치관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세상 일 꼬인 사람 보면 교회에 가야 풀린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가치관의 실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어떤 표적이 없어도, 또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공로를 쌓으려고 노력하는 중에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신뢰하면 그로부터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 엎드러진 자 곧 실패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가 ‘나는 여호와를 의지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 바로 세상이 그렇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을 의지하며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존재로서 대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이 환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도 사람들이 자신의 엎드러짐을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오히려 그것이 여호와의 빛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성전의 휘장을 찢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로 하나님께 의로워지려는 가치관과 신앙이 볼 때 하나님을 존재로서 신앙하는 것은 엎드러진 실패자와 같고 조롱거리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빛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구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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