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선지자의 말씀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가진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그 가치관이 서로 달라서 혈육끼리도 서로 비방하는 죄악 속에 살아갈지라도 자신은 여호와를 섬길 것이라고(미 7:7) 말씀하고 그런 자신과 같은 모습이 자기 가치관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 조롱과 경쟁자 소멸이라는 기쁨으로 살 것이지만 결국 그런 삶들은 황무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지만 혈기가 있고 왕성하며, 자기 힘이나 뜻대로 되는 몇몇 일을 자기 정체성과 명찰처럼 생각하며 살지만 육신이 소진하여 감에 따라 그 자랑하던 것은 기억만 남고 다시 그렇게 하려해도 육신이 따르지 않는 허무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자기 생각에 옳은 일이나 자기 육신으로 하지 못하는 것을 입으로 주장하면서 이른바 꼰대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모습들이 바로 인생의 황무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이 어떠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회복하게 하시고 그 회복된 모습에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신다는 것과 애굽 땅에서 나올 때의 기적을 보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신다는 것은 풍요로움과 회복(도피성)을, 애굽에서 나올 때는 세상의 종살이를 벗어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산과 길르앗은 풍요로운 지대이기도 하고 길르앗에는 회복을 상징하는 도피성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신다는 것은 풍요로운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은 말할 것도 없는 구원과 회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회복은 세상적인 회복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으면 경제적 상황의 회복과 세상에서 하는 일이 회복되는 그 회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회복은 인생이 황무해지는 지경에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는 황무함에서 자신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목적 그리고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살아가는 형편은 그 다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삶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은 인생 최대의 성공입니다. 어떤 것이라도 그 존재의 목적을 알아야 활용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선풍기 날개를 고정하는 나사가 왼나사인 것은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날개를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왼쪽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만든 이들의 생각과 기술에 감탄하기까지 하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삶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면 그 삶에 어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든 다른 신을 믿든 일단 삶은 곤고한 것, 고난인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앙의 이유가 곤고한 삶의 위로와 극복, 그 가운데서 뜻대로 되지 않는 자기 생각을 이루어주는 신으로서 신앙을 합니다. 그러니까 삶, 그 자체가 감사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을까 싶은 마음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삶이 감사한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경제적인 문제나 삶의 여러 어려움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생의 곤고함으로 여기는 문제들을 문제로 여기는 것은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인생의 허무함인 것입니다. 출근을 위해 새벽에 눈을 뜨고 억지로 일어나서 씻으러 가면서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며, 병드는 것, 육신으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 맘대로 되지 않는 자식이나 사업과 같은 것들을 대하면서 어렵게 느끼고 그것이 인생의 곤고함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인생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런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까를 고민하고 그 도움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을 신앙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이 미가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의 핵심인 것입니다.


인생은 곤고한 것이라는 기초 위에서 그 곤고함을 이기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믿는 하나님이 자신의 곤고함을 이기는 도우심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 고민한 결과 수양의 기름과 같은 신앙이라 회칠한 자기 행위와 공로를 드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로를 드리기 위하여 무엇이 좋을까 하여 궁리하는 중에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 성공이라 칭하여 지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려 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사마리아라는 야곱의 수치라는 것이 이 미가 선지자 말씀의 근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가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야곱의 수치라는 사마리아와 같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여호와, 곧 존재의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 그 존재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되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인데, 사람이 믿거나 믿지 않거나에 따라서 창조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심을 믿는다면, 이 세상을 가장 잘 살고 평안하게 또 성공적으로 만족하면서 사는 방법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을 알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설사 그 뜻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육신에게 어떤 불편함이나 그 이상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온전하고 성공적인 것입니다.


자동차 브레이크가 엄청난 마찰을 견디는 것은 일면 불편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인 이상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이 온전한 것이고, 자기 존재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온전한 것임과 같이, 사람도 육신으로 수고하는 것이 때로 불편하다고,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지 않고 자기 육신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신으로 여기고, 그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육신으로 하나님께 공로를 드리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불온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산과 길르앗으로 비유되는 풍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으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곳이 하나님이 보실 때 풍요로운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삶의 어떤 부분은 실제로도 아브라함과 같이 풍성하게 됩니다. 존재가 존재 목적대로 사는데 형통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복음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가지신 의를 알고 살아가면 잘 풀리게 되어 있는 것이 이치입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서 그 풍요가 순교와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고, 오늘날 많은 선진국에서 누리는 풍요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하나님의 복이고, 어떤 것은 죽어서의 영광을 담보로 하는 시련이라는 식의 사고는 바로 사마리아와 같은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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