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8:1-15 부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9. 5. 13:28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되심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것이야 죽었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죽으심 자체가 큰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렇기 때문에 장사되심 역시 그렇다. 죄인으로 죽이심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십자가를 보면서 서울을 보듯, 놋 뱀을 보듯 그것이 죄인 된 나의 모습이요, 그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표상이었듯, 주검으로 무덤에 뉘었다는 것 역시,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고 죽임 당한 자와 같은 삶을 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에 대하여 죽은 자들, 또한 사망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신다. 이는 물론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표현들이 육신적으로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피조물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가지 않는 멀쩡한 시계를 보고 죽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반대로 육신이 살았다고 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살아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영원에 관한 것이다.(영원은 지금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고 다음에.) 그런 관점에서 무덤에 장사 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산 생명인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나타내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나타내신 예수님은 그 몸이 설사 무덤에 죽은 자로 누워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 안에 사람의 유전자와 본성이 있어서 육신의 모든 삶과 행동이 사람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정체성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정한 생명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활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시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부활이라는 것이 별게 아닌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인생을 부활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기준으로서의 명확성은 분명하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살리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이 살아있다고 하나,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이들이 사는 법 역시 같은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는 것, 곧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거듭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거듭남과 부활은 그 법이 같다. 그래서 죽어서 믿는 자는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거듭남이든, 부활이든 어쨌든 살았다고 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서 믿는 자는 산자와 같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믿어 산 자는 육신을 죽인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정말로 분명하게 짚고 갈 것은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기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정체성이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생명의 주관자이시다. 그것은 어떤 행동이나 공로나 소유의 드림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어떤 생명을 가진 존재인지가 분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 가서 청소하고 봉사하며 또한 세상에서 아주 도덕적으로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것이 중요하나, 그 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생명이 그 안에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산 자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기도도, 봉사도, 도덕적인 삶도 그 생명에서 비롯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인 사람의 정체성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부끄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이고 실패자요 죄인인 인간의 연약한 모습, 사람이라면 다 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감추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는 죄인이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자 중에서 살리실 수밖에 없는 살아 있는 생명이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된 존재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또 하나의 그리스도(a christ)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통하여 그런 생명을 가진 이를 살리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니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십자가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과 그리고 부시 살리시는 부활로 보여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생의 운명이고 그것이 사람을 지은 목적을 아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의며, 인생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고 보이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장사되신 예수님을 무덤에 두고, 예수님을 그렇게 죽인 자들이 돌로 무덤을 막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안에 두실 수 없다는 것이다. 돌로 막았다는 것은 율법으로 막았다는 것이다. 즉 형식으로 의에 이른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가치관으로 막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서 말씀하시기를 그(예수님)는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부활은 정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도 기적이지만, 그것이 이 기적의 본질이 아니다. 이 기적의 진정한 본질은 인간의 정체성을 인정하므로 죄인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고 살리신다는 것, 그것이 기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감출수록 세상에서 성공하고, 심지어 교회나 신앙 안에서도 그렇게 고상해지고 유력해져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인간의 연약함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하고 인정할 때 죄인이 되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죽은 자와 같이 되어 버린바 되고 외면 받는데,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심으로 오히려 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것이 부활의 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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