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57-66 무덤에 묻히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9. 4. 15:0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 해서 받아와서 자신이 죽으면 묻히려고 예비했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내었다. 그런데 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혹시나 실제로 일어날까 싶어 무덤을 봉하고 그것마저 안심이 안 되어서 병사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까지 줄곧 이 마태복음의 말씀이 오늘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해 왔는데, 그렇다면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오늘 예수님을 믿고, 그의 제자가 되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또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기독교신앙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죄를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그 죄로 인한 처우를 인정하고 수용하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안 되면 신앙에 갈등이 생긴다.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자신들이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죄를 시인하면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문자대로 읽고서 스스로 그 말씀으로 자신을 의롭게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죄를 시인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의롭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하게는 의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로워지는 것은 아주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내가 죄를 시인했으니 이제 나는 의롭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하게 죽었고, 그 죽음이 순종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신 것이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지 말라는 행실의 교훈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이유를 알면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신바 된 것은 사람이 자기의 정체성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닫고 나면 그때까지 자신이 가졌던 신앙이 철저히 죽고 나와야 한다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무덤에 주검을 장사 지낸다는 것은 정말로 확실한 죽음의 결과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지낸바 된 것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의하여 살던 자아와, 또한 그런 가치관 앞에서는 철저히 죄인이 되고 장사지내는 것과 같이 확실한 죽음의 과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죽음은 예수님을 죽인 가치관이 무덤의 입구를 막고 지킬 정도로 확실하게 하고 싶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죽음을 당한 이들을 살리신다. 그런 죽음의 과정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전의 가치관이 아닌 그리스도의 가치관, 하나님의 의, 하나님 나라의 법,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교회의 집사님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돕게 되었는데, 산에 안장하는 것 까지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시아버지는 유교에 속한 분이었는데 살아생전에 다른 이가 죽으면 묘 터를 점지하고, 관을 놓는 방향 등을 봐 주시던 그런 분이었다고 했다. 어쨌든 그런 분이 돌아가셨으니 남아 있는 이들 중에서 또 그렇게 관의 방향을 정하고 묘 터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자 그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아내, 곧 시어머니가 그것을 보면서 한마디 하시는 것을 가까이서 우연히 듣게 되었다.


“영감 살아 있었으면,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할 텐데, 자기가 죽어 있으니 아무 말도 않네!”라고


그것이 죽음이다. 죽었다는 것은 어떤 시비,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도 무덤에 장사되셨다는 것이 바로 그런 상태다. 유대인과 로마인의 가치관에서 죄인이 되고, 그런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인 우리 모습을 대속하시며 보이신 예수님은 명백히 그들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었고, 또한 그들의 가치관으로 장사될 정도로 분명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을 죄인 만들고 죽인 그 법 앞에서 시체와 같이 아무런 것도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죽어졌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죽은 자로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의 제자로 또한 그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가치관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 무덤에 장사지내는데 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이 자기를 맘대로 하도록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삶을 포기한 듯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또한 언제나 영원토록 세상을 경영하시고, 또한 실수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경영하는 세상을 살면서 그 안에서 세상이 이러네, 저러네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덤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하여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심판 받아 죄인이 되고 죽임 당하신 분이요, 사람은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부끄럽고 죄인 같아도 그것을 자신의 모습이라고 들린 놋 뱀과 같이 십자가에 죄인이 되어 달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도 그 신앙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되려면 당연히 그 분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과정을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다 거쳐 내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모든 삶이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하라는 것이 아니다. 따라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지켜내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자기 안에 본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본성대로 살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의 옆으로 걷는 걸음처럼.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은 생명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명은 생명이 낳는 것인데, 생명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성경을 믿으면 산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속에 불어 넣어져서 그 생기가 생령이 되고, 사람의 본성이 되면 다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방법이 아니라, 성경을 조각내고 각 부분별로 연구해서 마치 인형이나 마네킹을 만들고 그 안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는 것과 같이 성경을 지켜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세상을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잘 경영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것을 역행하려 하니 힘든 것이다. 남들처럼 살아야겠다고? 누가 당신은 그래야 한다고 정해 주었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으로 지으신 뜻대로 사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그럴 때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창조주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베드로와 같이 세상에 대항하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우리 모습이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런데 신앙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이기려 하고 바로 잡으려 하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고 죽임을 당하면, 그렇게 자신이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수용하고 순종하면 무덤에 장사지낸 자와 같이 될 것이로되, 그 때 하나님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법이 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무슨 권세나 마패쯤으로 알고 세상을 사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굳이 살릴 이유가 없는 존재들이다. 자기 스스로 살았다고 설치며,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칼과 성경의 말씀을 조각으로 휘두르면서 사는 사람은 무덤에 있는 이가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살리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이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법 안에서 죽은 자로 보시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생명과 연결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요 죽은 자와 같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스스로 죄인이라면 할 말이 없을 것이요, 죽은 자는 반응이 없을 것이다. 능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의 법과 가치관 앞에서 죽은 자요, 무덤에 장사된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을 보이시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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