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하늘의 해가 그 빛을 잃었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져서 성소와 지성소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덤이 열리고 많은 성도의 몸이 일어났고 그들이 거룩한 성(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은 다 놀라운 것이지만 그것이 아무리 놀라워도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인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놀랍긴 하지만 나에겐 의미가 없는 그냥 사실에 불과한 것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일어난 사건이 나에게 일어나느냐 하니냐 하는 것이 정말로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내가 왜 예수를 믿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과 함께 일어난 일들이 어떤 것인지 볼 필요가 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신 것이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가상에서는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마태복음은 하나만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렸나이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것인가? 그리고서 다시 찾으신 것인가?


예수님께서 죽으시게 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정해 놓은 사람의 정체성을 떠나서 살고 있다는 것과, 그런 자리에서 돌아오기를 바라시면서 원래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를 떠난 모든 인생들, 그들의 모습을 보이시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유대인과 로마인의 가치관에서 볼 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세상의 법 앞에서 실패자로 또 죄인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아의 개념에 미치지 못하고 로마인이 가진 왕의 모습을 가지지 않으시듯, 우리도 종교적인 경건을 유지하여 의인에 이르려고 하다가 늘 실패하여 죄인이 되고, 세상의 경쟁력에서 언제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앞에서 패배자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과 로마인은 그런 모습을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처형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그런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그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신 모습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려서 부르는 “나의 하나님”, 예수님을 버린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진 자기 하나님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하나님이란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듯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을 말한다.(그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나의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신분이 죄인인데, 예수님의 신분을 죄인으로 만든 가치관의 하나님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자기 하나님을 좇는 사람들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이시는 것이다. 그 모습은 죄인이다. 이 죄인이라는 것은 이중성이 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고,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죄인이라는 것이기도 한 동시에 유대인의 가치관과, 정말로 왕이 되리라 기대한 제자들의 가치관과, 능력과 공로에서 이겨야 왕이 되는 로마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인간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광야에서 들린 놋 뱀에 비유하시면서 자신이 들려야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놋은 거울이고 그 거울의 모양은 뱀이었다. 그것을 보는 이는 살았고, 그것을 보지 않은 자는 죽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뱀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역시 거울이고, 또한 죄인이다.


즉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던 그런 죄인이라는 것을 거울과 같이 비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기준에 예수님이 죄인이었지만, 달리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거울과 같이 비춰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비춰질 때 그 때, 그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 제자들로 치면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이 되리라 믿었던 예수님, 유대인으로 치면 똥도 누지 않을 거룩한 모습을 가진 메시아, 그리고 세상에서 돈이 자기 하나님이었던 사람의 돈, 능력이 최고라며 내 주먹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람의 주먹과 같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외치신 “나의 하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라는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의 말씀이기도 하다. 시편 22편의 1-2절은 나의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하고 있고, 3절에 들어가면 영어 성경은 <But>이라고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사람이 스스로 만든 “나의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 곧 구분되는 여호와와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모습은 부끄럽게 여기고 세상적인 것으로 성공하여 인간의 연약함을 감출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스스로 만든 그 하나님, 하지만 그 가치관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또한 그 하나님의 힘의 근원인 머리의 생각이나 손과 발의 행동이나 옷과 같은 신분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나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함을 보여주시는 자리에서 외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우리 스스로 만든 하나님이요 우상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우리는 놋 뱀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우리 스스로가 만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우리를 뱀과 같이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십자가를 볼 때 자신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또한 사람을 규정하고 믿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믿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 로마인의 신과 같은 그 가치관은 오히려 나를 늘 죄인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십자가가 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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