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1-26 바라바의 석방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31. 12:0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셨다. 그 사이에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를 후회하면서 예수님의 몸값을 돌려주려 시도하다 받지 않자 성소에 던져 놓고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은 30은 당신 하인 한명의 몸값 정도라고 하는데, 그와 제사장이 예수님의 몸값을 정한 것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기도 하다. 


한 가지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면, 유다나 베드로나 아니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배신했는데 왜 가룟 유다만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생전에도 예수님을 보는 눈이 다른 제자들과 달랐기도 했지만(주라고 부르지 않았던 점에서) 무엇보다 잘못을 회개한 대상이 문제다. 물론 그것은 평소에 예수님을 주라 부르지 않는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그의 잘못을 제사장과 해결하려 했고, 다른 제자들은 다시 예수님과 해결하려 했다. 그것은 단순한 행동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을 보는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다른 행동, 그리고 결과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가룟 유다가 팔아버린 예수님은 결국 사형을 받게 되신다. 사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얼마든지 예수님께서는 사형을 받지 않으실 수 있음에도 이 길을 택하셨다. 이는 괜히 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이라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예수님께서 보이시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야 하는 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의 왕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다 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죽을죄인가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도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는 다른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 예수님과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메시아)의 정체성이 있는데, 예수님은 전혀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데 스스로를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면서 자신들이 인도하는 백성들을 미혹케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법정에 섰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사형을 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데리고 가서 사형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빌라도는 아무리 봐도 죽일 죄는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의 눈에 예수님은 한낱 정신이상자 정도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초라한 꼴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이 그가 볼 때 어쩌면 우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자기 아내까지 꿈을 꾸었다며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결단 있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유월절에 사람을 죄인을 하나 석방해주는 규례에 따라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선택하라고 했고, 기다렸다는 듯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선택했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는 물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고, 또한 그 피를 자기들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고 사형을 선고 받는 때는 유월절이다. 이 유월절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는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이다. 출애굽 당시 마지막 재앙으로 처음난 모든 것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집 안에서 그 양고기를 먹으라고 하셨다. 처음 난 생명을 대신하여 양이 죽은 것이다. 그와 같이 처음 난 사람 곧 아담의 후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이다.


유월절의 기원인 출애굽의 때의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만들었다. 모세가 바로왕을 찾아가서 요구한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하나님께 어떤 행동으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굽에서 종으로 살고 있는데 어떤 자치권이 있다고 그렇게 큰 죄를 짓겠는가? 그들이 구속을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자리에 있지 않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회복하는 것을 위하여 어린 양이 죽어서 문설주에 피를 뿌린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 양이신 것이 그것이다. 모든 백성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은 벌을 대신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아니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떠나버린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자리를 보여주는 대속이다. 그래서 유월절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인 것이다. 바라바가 놓인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의 대속을 예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사람의 자리를 떠난 모든 인생은 다 바라바와 같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은 다 바라바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은 바라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에 자신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바라바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하여 자신이 석방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시인하면 용서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자리이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착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품성, 곧 하나님의 형상이 생명이 됨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바라바의 대속으로 또 모든 인생의 대속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괴려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세상일에 선하고 악한 것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떠나는 자리, 육신을 가진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내용으로 받아서 표현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대속이고,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바라바와 같은 우리 모두를 대속하신 것이다. 그것이 유월절이 나의 사건이 되는 것이고, 내가 바라바와 같이 해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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