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14-30 달란트 비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16. 11:52 Writer : 김홍덕

유명한 달란트 비유다. 이 달란트 비유를 이야기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지금 말세에 관하여, 또 재림에 관하여 또 달란트 비유와 같은 이 말씀들을 하시는 시점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보내시기 위하여 오셨고, 예수님의 유월절은 곧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오셔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고 이 말씀들을 본다면, 예수님께서 몸으로 다시 오시는 것만 생각하게 되고 멸망을 이 지구가 멸망하는 것으로만 보게 된다. 그것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대(당시 세대)가 가기 전에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것은 거짓말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거의 마지막 말씀을 거저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살라든가, 아니면 맡은 일에 충성해라는 것과 같은 말씀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가 곧 죽을 것을 아는데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의 가장 중요한 것 아닌 것을 논하겠는가?


달란트는 앞에서 한번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의 화폐가치로 볼 때 약 90,000일의 노동자 일당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돈이다. 그러니까 달란트는 개인이 벌거나 갚거나 소유하거나 하는 수준의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얻을 수도 같을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초인간적인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받았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내어놓을 수 없는 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다섯, 셋, 한 달란트를 나눠주고 타국에 갔다 와서 그 달란트를 어떻게 하였는지 확인하였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받은 것과 같은 달란트를 장사하여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달란트를 감추어 두었다가 꺼내왔다. 그리고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주인은 능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심지 않아도 거둘 수 있고, 또 헤치지(헤집지) 않아도 모으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은 매우 화가 나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을 내어 쫓아 버렸다.


먼저 이 달란트 비유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장사하다 망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점과 왜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적게 주었는가 하는 것과 같은 것을 가정하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고 떠날 때 장사하라고 한 적도, 갔다 와서 회계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이의 판단도 나쁜 것은 아닌데, 그것이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다.


이 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셨다는 것은 단순히 재능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만 가진 사람 입장에서 절대적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이다. 이는 달란트가 당시 가치로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가치였던 것과 같이, 스스로 인생에 들어온 것이 아닌 인생의 존재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 그 누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정한 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존재 목적도 스스로 가질 수 없는 달란트와 같은 것이다.

더욱이 이 인생의 정체성이자 존재 목적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내는 형식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이것이 얼마나 큰 달란트를 받은 것인지를 말해준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그 사람의 존재 목적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을 위한 존재라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존재를 나타내고 그것을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으로서 가질 수 없는 달란트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창조 목적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정확히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과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면 모양이나 생산지에 무관하게 언제나 사과이듯,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육신으로 나타난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기에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되면 그 또한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이기에 자연스럽게 장사가 되는 것이다. 장사의 기본은 물물교환이다. 지금은 돈과 물건을 바꾼다. 하지만 어쨌든 장사의 기분은 물물교환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그 목숨으로 또 다른 그리스도를 사신 것이다. 그것이 장사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 인간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삶을 드려서 다시 사람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다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 안에 그런 장사, 곧 생명의 분화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장사하기 위해서는 감추지 않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 곧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처음 감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을 찾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으심에도 숨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이유를 말했는데 그 아담의 말과 한 달란트 받은 이의 변명은 너무나 같다.


“내가 벗었음으로 부끄러워 숨었나이다.” 하는 것과 “주인은 심지 않은 것에서 거두시므로 달란트를 감추었나이다.”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달란트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의 능력은 심지 않은 것에서 거두고, 헤집고 찾지 않아도 모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주인이 준 달란트는 감추어야 하고, 주인의 신비한 능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한 달란트 받은 이의 논리는 유대인들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나사렛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살아가는 나사렛의 거주민과 같이 살아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행위라는 것 속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었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이가 땅에 묻어 감추었던 것과 같이.


주인이 종에게 준 달란트는 종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께 받은 이 육신도 사람이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육신이 인생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기에 이 육신을 주신 목적과 이 육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더더욱 인간이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다 종으로서 받을 수 없는 달란트를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주인이 종에게 준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삶을 통하여 자신과 동일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달란트를 가지고 시장에 가서 장사할 때 자기 가진 것을 난전에 내어 보이듯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삶을 감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것이 감추고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그것을 받은 자로서 그 목적을 또 전하고 낳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처사는 보편적 개념으로 보면 소심하고, 또 어리석은 행동일 수는 있지만 솔직히 악한 행동은 아니다. 횡령을 한 것도 아니고 이자를 얻지 못한 것을 손해로 보지 않는다면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의 행동을 <게으르고 악한 것>이라고 했다. 왜 그것이 악한가? 그것은 먼저 주인이 준 것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랬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이 드러나니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처사가, 또 창조가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악한 것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 주인을 판단했다는 것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같은 메시아를 보내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치 심지 않은 것을 거두듯 인생 그 이상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분이라는 것은 기적을 행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것(심은 것) 그 이상의 능력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범한 육신과 신분을 가져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죽어버리는 예수님이 메시아일리 없고, 그런 메시아를 보낼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종 역시 유대인과 같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가 악한 종이라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재능을 주셨다는 한정적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마무리 하고, 가장 중요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앞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삶과 육신의 존재 목적을 설명하시는 십자가를 앞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이 종에게 주었다는 이 달란트는 한낱 재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셨는데 어떤 이는 자신에게 주신 것을 다 보이고 자신에게 주신 이 육신의 삶을 장사하듯이 투자하여 다시 주인이 주신 것을 얻었고, 어떤 이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삶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신을 십자가에 버리심으로 다시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깨달은 사람은 얻은 것, 그것이 바로 장사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 그리고 이 육신은 다시 주인이 준 달란트를 얻기 위하여 투자할 밑천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육신이 부끄럽고 감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 그대로를 보이고, 또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도구로 투자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다시 얻는 것에 사용하라고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인생을 주시고, 이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얻는 것에 사용하고 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천하보다 귀한 목적 안에서 주신 것, 그것이 바로 달란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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