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25-28 회 칠한 무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4. 16:49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지도자들을 늘 책망하시고 제자들에게 그들을 따르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타락했을까? 물론 기득권이라는 계층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부정부패마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의 평균에 비하면 아마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성전에 예물을 드리는 것이나,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율법이 명시한 각종 규례를 지키는 것에 있어 별다른 타협 없이 지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본다 해도 아주 도덕적인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늘 예수님께 책망을 받고, 그들로서는 같은 자리에 앉기에도 부정한 창녀나 세리보다 늘 못한 존재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지금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늘 책망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보면서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그랬을까?’ 싶겠지만, 성경을 기록하다 ‘여호와’라는 단어만 나오면 목욕하고 붓을 새롭게 하고 의복을 갈아입고서 기록했던 서기관들의 경건한 행동은 오히려 지금의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경건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당시에 보이신 모습은 지금의 사람들이 예수님이라면 막연히 모든 행실이 경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 비해서 행위 규범은 오히려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유대인들은 의가 같지 않으면 같이 밥을 먹지 않았는데, 창녀와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그 당시 적어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물을 절기에 맞추어 드리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행동은 그 시대 사람들의 도덕적인 기준, 또 보편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이라고 하면 화장실도 가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행동과 종교적 규례를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제사장을 틈만 나면 책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의 행위가 어떠하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행동이 아무렇게나 해도 의와 뜻만 잘 지키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그것을 영지주의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의 겉과 속이 같으냐 아니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도적은 도적이라 하고, 경건한 자는 경건하다 하는 것이 의롭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속이 어떤지를 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행동을 경건하게 유지하려 애를 쓰는 바리새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경건하지 못하고 부정한 것이 근본인 존재인가? 하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근본 모습이 부정한가? 아닌가? 라는 관점이 아니라, 사람의 본 모습을 누가 부정하게 여기느냐의 문제이다.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마음들, 그 중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자기 안에서 나오는 모습들과 본성들을 누가 나쁜 것으로, 누가 감추어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감추는 것이 경건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가 감추고 있지만 누구나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모습들도 다 인간이기 때문에 가진 것이다. 더욱이 그런 것들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자신이 원해서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감추고 싶은 것을 누가 자기 안에 일부러 두겠는가? 다만 그런 감추고 싶은 모습,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떤 기준과 정의(definition)를 가지고 있고, 그 기준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을 감추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법>인 것이다.


특히 율법이란, 지키면 그렇게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고, 남이 보면 자신을 부정하게 여길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행동하는 기준, 그것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율법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세계 밖의 사회도 사람의 마음에 어떤 것이 있든지 행동으로 어떤 기준을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면 속사람은 어떻든 간에 그렇지 않은 것으로 공인하기로 서로 정한 것이 바로 사람들의 법인 것이다. 그것을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한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받은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본성을 감추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자신의 행위로 감추고 싶은 것을 회칠하듯 감춘 것을 두고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든 서기관이든 어떤 인간이라도 예수님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 같은 본체이시기에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는데, 율법적인 행동을 지켜 행하면서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 한 것, 그것이 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감춘다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추는 것이다. 아이들이 컴퓨터로 게임을 하다가 엄마나 아빠가 들어오면 화면을 감추는 것은 게임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지, 게임에 져서가 아니듯이, 율법이 정한 행위를 지킴으로 자신들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을 감추려고 하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자기들이 가진 기준으로 볼 때는 감추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기준,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그 기준으로 창녀와 식사를 같이 하는 예수님을 보면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자기 안에 있어나는 음욕을 부정하게 여겨서 감추려고 온갖 힘을 쏟고 있는데 그 음욕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오히려 매매하는 창녀들과 예수님이 함께 밥을 먹으면서 자신들을 비난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안에 성욕이 없다면 어떻게 아이를 얻을 수 있겠는가? 


성욕이든 욕심이든 어디에 쓰이고, 그 주신 목적을 알고 그 안에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마음에 그것이 있다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런 사람의 본성과 마음은 당연히 사람을 지으신 분이 사람 안에 두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자체를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것을 사람 안에 두신 이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사람 안에 그것을 두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즉 자신이 선하게 여기는 기준에 동의하는 신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을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표현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 사람의 모든 본성을 자기의 기준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고 나쁜 것은 감추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린 아담의 모습과 같이 율법(무화과는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의 나무임)을 지킴으로 자신들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려 하고, 그것을 선하게 여기는 자신들의 하나님을 따로 만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것은 그 행실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그런 행동에 대하여 가진 가치 기준, 곧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나누어서 부정하게 여기는 자신들의 기준이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무덤에 회칠하듯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감추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기준으로 볼 때 악한 것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일부를 감추는 것을 의로 삼는 자신들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책망은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오늘도 누군가가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종교적인 모습, 도덕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한다면 그 역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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