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리고 누구나 남을 부리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랍비 곧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형제이고 선생은 유일한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의 정체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온전히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삶을 산다면 그 또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 선뜻 수용하기에 민감한 부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고? 그럼 이단이지?’라며.


하지만 사람이 그리스도가 될 것이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실 이유가 없다. 물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모든 사람의 표상이고 기준이다. 그래서 영어로 표시할 때는 the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모든 인생은 또한 그리스도(a christ)이다.


이것은 신앙적 타락이나 변질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신격화와 같은 이단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온전한 복음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요 제사장과 같은 삶이되기를 바라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하나님의 그 뜻(LOGOS)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이다. 즉 육신을 가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창조 목적을 육신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몸소 오셔서 그것을 보이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이단 논리가 아니라 진정한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일한 지도자인 것이다. 지도자란 따르는 사람에게 바른 것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을 좇는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에게 하나 밖에 없는 지도자인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고, 자기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고 따라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 지도자이신 그리스도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분이신 것을 예수님께서 전하셨고 또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도자', '선생', 그러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가진 선생이나 지도자가 되지 말고, 오직 너희 삶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정말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도자의 정체성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지도자나 선생은 결국은 대접을 받고 가르친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앞에 있다는 것에 조금만 심취하면 따라오지 못하거나 알아듣지 못한다 싶을 때 훈계나 질책하기도 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런 지도자였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눈만 뜨면 예수님께 혼났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까지, 아니 부활하셔서 변화된 몸을 보이셨음에도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온전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책망보다는 몸소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마음 안에서 그들이 본 예수님의 모습과 들은 말씀이 땅에 심긴 씨앗이 싹이 나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깨달아지도록 기다리고 몸소 보이시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바로 그런 모습이 남을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고자 한다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면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모습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섬기는 존재이고, 또 반면에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이 섬기고 따라야 할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모든 사람의 지도자이고, 그리스도의 성품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모른다고) 사형을 당하셨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의 단면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예를 들어 목사와 성경에 대하여 논쟁하다 목사로부터 모르겠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은가? 정말로 목사가 성경에 대하여 다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건 목사는 성경을 잘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라는 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회칠한 무덤 같은 논리이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무덤과 같이 죽고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사라는 신분은 성경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 취급 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성경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가장 잘 알면서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모순인가?


그것은 비단 목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아노라 하면 하나님을 모른다는 심판으로 죽어 나가는 모습을 수용할 마음으로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단 받는 랍비와 예수님께서 듣지 말라고 하는 선생이라는 칭함을 받는 사람일 뿐 그리스도의 제자나, 성경을 가르치는 온전한 선생의 모습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발을 씻어 주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내려서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유모차처럼 생긴 보행 보조기를 손에 잡고 힘들게 서 있었다. 그런데 횡단보도 밑에 내려서 계셨기 때문에 차가 지나갈 때 불편했다. 그때 어떤 차는 조심스럽게 속도를 죽이고 맞은편에 차가 오는지 살피면서 피해갔다. 그런데 어떤 차는 큰소리로 경적을 오래 울리면서 빠르게 할머니 앞을 지나갔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가 편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의 차이다. 조심스레 지나간 차는 남을 섬기는 것이다. 반면에 경적을 울린 차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칭함을 받지 말라는 선생의 모습이 그것이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해보면 별게 아니다. 다만 자존심 상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지 못하는 분함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인데 다만 내가 생각할 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딱 그것 하나로 인해서 그러고 싶지 않고, 그러면 안 되고, 그러면 내가 불편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선악과다. 내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화평과 안식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옳고 그런 것 중에 가장 큰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님께 주장하고 결박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순종하신 분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즉 선악과를 먹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이란 예수님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므로 예수님을 죽은 자 중에서 살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육신 가진 예수님께서 보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바로 그런 것에 쓰라고 주신 것이다.


더 알고, 더 밝은 것은 무식하고 어두운 자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같이 내어주고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내 보이는 것이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섬기는 그리스도, 그 정체성은 더 알기에 죄인이 되고 모르는 이들을 섬기는 것, 그것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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