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34-40 가장 큰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7. 27. 14:10 Writer : 김홍덕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모여서는 예수님께 자신들도 다소 엉뚱한 질문을 예수님께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느 계명이 큰가?”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질문은 질문 자체로서 아주 멍청한 것이다. 왜냐하면 계명에 크기와 중요도가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명에 크기와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계명을 지켜보면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 있고, 또 지키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결과가 큰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명이라는 앞의 여러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모양과 내용이 행동 규범 같아서 그것을 몸으로 지켜내면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그렇게 지키려 했고 그런 그들의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늘 경계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다는 것은 계명의 본질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명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이 있으면 삶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동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 계명이지 계명을 지킨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명에 크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계명을 지켜보려 하면 어려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크기가 다르게 여겨지지 않는다. 생명체가 보여주는 행동은 그 생명의 DNA가 있고 살아 있으면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한대로 그대로 다 표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신명기 6:5절의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이 두 말씀이 모든 율법의 전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계명만 있다면 계명의 모든 것이 다 지켜진다는 말씀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라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고 하면 내 존재의 모든 의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존재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내가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이 이루어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하나님께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과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그 사람이 인정하고 순종하고 알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다고 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계명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정립되면 모든 계명은 자신을 통하여 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시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의 뿌리요 근원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천하의 어떤 하나님의 계명도 다 이것에 종속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쟁으로 치면 전쟁을 이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전투를 이기는 것이고. 그러니까 전투를 아무리 이겨봤자 전쟁에 지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천하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켜도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을 통하여 그 성품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이 수용하는 관계가 잘못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또 어려서부터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쳐도(육신을 가지고 그럴 수는 없지만 그렇다 쳐도)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역 주민에게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는 자수하지 않은 간첩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지켜야할 가장 큰 계명은 계명을 지키는 수고와 노력에 따라 크고 작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것,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서로에게 의미를 가지는 관계를 정립하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계명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단순히 밥 퍼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밥 퍼주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계명을 논하는 것에 있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음에 그것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육신의 가난함과 같은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생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이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전하므로 그 사람이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미가 있어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할 때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오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사건에서 그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과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수고롭게 바치는 것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이미지(형상)가 표현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의 뿌리요 DNA요 생명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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