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귀신에 대한 논쟁을 거치면서 예수님께선 시비를 거는 이들을 성령 훼방이라고 강하게 책망하신 이후 특별한 시비는 줄고 예수님이 주도하는 시간과 사건들이 이어진다. 비유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시며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등 주도적으로 복음을 전하신다.

 

특히 복음을 비유로 전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눈에 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어떤 이들이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란 말씀이 그것이다. 마가복음의 구성으로 본다면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을 겨냥한 말씀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그들로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막 4:12)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예수님께서 특정한 이들을 배제하는 모양새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대로 성령 훼방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이 아니라 상태다. 생각해보면 성령의 훼방하는 상태나, 보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는 같은 상태다. 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결과도 같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을 구원에서 배제하시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죄와 사망에 빠져 있다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성령을 훼방하는 상태, 예수님을 보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인생을 산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이 오시기 전,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가 형성되는 만남 이전에는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이고 말씀을 들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둘로 나뉜다. 자신의 가치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살아왔던 자기 삶이 그릇된 것임을 알고 돌이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돌이키는 사람은 구원받고 비유의 말씀도 자기 것이 되나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에 머문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전해졌으므로 지금 인류는 그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건 오늘날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상태다. 누구나 동의하듯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구원을 받은 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구하고, 육신의 정욕에 속한 먹는 것, 시험 치는 것, 연애나 자녀 그리고 육신의 건강과 같은 걸 구하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걸 보면 대부분이 이런 사람이다.

 

육신의 필요를 구하고 세상에서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기 전이나, 다니는 지금이나 여전히 세상의 것을 구하는 사람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변화가 없는데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는 없다. 먹이가 같고, 본성이 같으며, 소망과 평안과 안식이 같은데 다른 생명이라고 할 순 없다. 이같이 육신의 정욕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건 거듭난 게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을 빌미로 세상 사는 자기 육신의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 그들에겐 비유를 포함한 모든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은 자신이 구하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얻는 방법, 도구, 지혜, 가이드일 뿐 자기 본성에서 비롯된 삶의 모습은 아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전하시는 예수님 말씀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

 

이처럼 너무나 아쉽게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대부분은 구원도 없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셔서 알아듣지 못하게 하겠다는 사람에 속한다. 너무도 분명히 예수님은 낮고 천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음에도 세상에서 높여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이게 바로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낮고 천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게 예수님을 보고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것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심은 복음을 차별적으로 전하시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만 구원하시겠다는 고약함을 가지셔서가 아니다. 비유든 직설적 화법이든 예수님과 같은 생명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란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 성령께서 역사할 여지가 없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바로 심기지 않은 사람은 어떤 방식의 설명도 의미 없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보는 이상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그들에겐 바로 이야기해도 비유로 들린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어두움이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안목, 같은 생각을 하는 존재로 났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하나님께선 낮고 낮은 십자가에서 사람 지으신 뜻을 보이셨는데, 그 십자가를 이용해 세상에서 높고 평안한 곳으로 가려는 생각으론 그 어떤 예수님의 말씀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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