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다른 멸망의 기준


사람에게 멸망을 논한다면 단연 죽음이 가장 큰 멸망일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멸망의 대명사는 곧 죽음이고, 죽음의 다른 의미가 멸망인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도 다르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멸망은 결국 사망이다. 그리고 그 사망은 육신의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과 멸망이 육신에 관한 것이라면 죽음이 정해진 사람에게 구원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멸망이나 사망을 논하는 것은 육신의 호흡에 관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나 멸망은 다른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육신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육신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극히 육신의 어떠함에 수렴한다. 


하나님께 얻고자 하는 것, 흔히들 은혜라고 하고 얻었다고 여기면 감사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가에서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 만약 솔직하다면 자신들이 은혜나 감사로 여기는 것은 대부분 건강이나 사업의 성공이나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들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신의 어떠함을 신앙의 척도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앞서 사망과 멸망의 기준이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대입해 본다면, 기쁘고 감사한 기준이 육신에 있다고 하는 것은 사망과 멸망을 육신의 일로 본다는 의미이다. 같은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를 기쁘고 감사하게 하는 것이 육신의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과 분명히 기준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사망과 그 일의 멸망을 사망과 멸망으로 보지 않는데, 사람들은 육신의 일을 기준으로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다른 기준? 그것이 곧 사망과 멸망


사람들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하여 존중이 미덕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서도 “의”에 관한 것은 좀 다른 문제다. 나라의 근간인 “의”가 다르다는 것은 간첩이나 국가 전복을 도모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형법 중에 유일하게 의도만으로 처벌 받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인 문제가 된다. 즉 하나님 앞에서 “의”는 절대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시고, 의가 다르면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한 사망과 멸망이 무엇이냐를 가늠하는 기준이 육신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성경이 가진 다른 기준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게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그 기준이 같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 죽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차피 다 멸망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남들과 달리 절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이 멸망과 사망에 대하여 다른 기준을 가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사망과 멸망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지만 은혜와 축복에 관한 것은 같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은혜와 축복은 같은 선의 양 끝단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이라는 것은 바로 기준이다. 그리고 기준은 의에서 비롯된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안에는 동일하게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그 기준은 명확하게 다르듯, 하나님의 기준에도 사망과 멸망 그리고 은혜와 축복이 있고, 사람의 기준에도 사망과 멸망 그리고 은혜와 축복의 개념이 있다. 


그것은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사망과 멸망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은혜와 축복은 사람의 기준으로 묶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선과 민주주의의 악을 묶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간음이다. 본질이 다른 것을 혼합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서의 성공을 은혜로 여기는 것이 간음인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의 중함을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과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의가 다르다면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일 뿐 아니라 오히려 적과 같고 원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망과 멸망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망과 멸망 그리고 죄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분명히 의도한 바가 있을 것이다. 하물면 사람도 의미나 목적 없이 무엇을 만들지 않는데 하나님은 더더욱 그렇다. 아울러 사람이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일을 하고 무엇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 그리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의가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람도 쓸모없는 것은 다 버린다. 따라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사망이다.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멸망이고 사망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 나오는 멸망도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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