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4:1-6) 보아스와 그보다 우선하는 친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23. 08:34 Writer : 김홍덕

보아스는 자신이 룻의 기업을 무를(책임질) 사람이기는 하지만 자신보다 책임의 순위가 먼저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룻에게 설명하고 그 사람을 만나서 그의 의견을 들어야 하며, 그가 룻의 기업을 무른다고 하면 룻은 그와 결혼하여야 한다는 것도 설명하고 그 사람을 만나서 그의 의견을 듣는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오미와 룻 소유의 땅에 대하여는 자신이 책임을 지겠지만 룻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그 후사를 잇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가 끼칠 수 있으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보아스나 그 친족이나 입장은 비슷한데 왜 다른 결정을 했을까? 친족은 땅은 모르겠지만 룻을 아내로 삼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 물론 성경에는 어떤 이유로, 어떤 손해가 날 것이라 예상했는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보아스와 친족의 또 다른 차이는 룻을 아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보아스는 룻이 자기 밭에서 성실하게 이삭을 줍는 것을 본 것은 물론이고, 룻에게 직접 룻이 시모에게 한 일과 그의 여정에 대하여 들었고, 그것을 선하게 여긴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보아스는 룻이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이야기의 주제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두 사람, 보아스와 기업을 책임질 우선된 권리를 가진 이 친족은 두 아담을 연상케 한다. 친족은 첫 번째 아담을, 보아스는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에 비할 수 있다. 첫 번째 아담은 땅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그 땅의 내용을 취하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흙으로 지어졌는데, 흙으로 지음 받은 상태 보다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 사는 것은 손해와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오미와 룻의 땅은 형식이다. 그 내용은 주인인 룻이다. 그 땅은 룻의 아들을 위한 땅이기 때문이다. 이는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후사 곧 아들을 낳을 책임은 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드릴 의사가 없다는 것이고, 또 자신에게는 그런 생명이 없다는 의미이다.


첫 아담이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다. 그래서 보아스의 친족이 룻의 기업을 무르지 못하게 된 것과 같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다.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만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에덴은 만족의 동산이기 때문이다. 즉 땅과 같이 흙으로 지음 받은 인생이 만족스러워지지 않는 순간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후사를 잇는다는 것이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나 육신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둘 다 흙으로 지음 받은 육신의 삶에 만족이 없고 그대로 사는 것은 손해요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모습 그 자체이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삶은 만족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주신 그대로 사는 것은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만족이 없는 것이다. 만족하는 자는 더 노력할 것이 없다. 자기가 만족하는 것을 누리고, 그것이 더 왕성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으로 살 뿐이다.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없다는 자백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먼저 접하는 것은 대부분 성경을 행위로 지키는 것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땅을 주신 목적이 아니라 땅은 경작하고 소유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육신을 주신 목적을 생각지 않고, 그 육신을 어떻게 단련하고 노력하며 그것을 평안하게 소유할 것인지를 사고한다. 그런 신앙이 바로 첫 번째 아담이다. 첫 번째 아담이 육신으로는 만족되지 않고, 육신으로 사는 것을 손해로 여겨 하나님이 되려 했던 것처럼 육신을 어떻게든 성경대로 금욕적으로 훈련하고 연단하여야 한다고 외치는 오늘날의 신앙은 모두 첫 번째 아담과 같은 모습이다. 그것을 율법적인 신앙이라고 일갈할 수도 있다.


그런 신앙은 아들을 낳는 것에 관심이 없다. 땅에만 관심이 있다. 아니 그런 신앙은 우리에게 아들을 선사할 수 없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남편은 하나님의 의를 좇는 룻의 남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자기 존재의 목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이, 첫 번째 아담이 남편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육신의 어떠함(땅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두 번째 아담이 남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가 진정한 남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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