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3:6-18) 타작마당의 보아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20. 08:40 Writer : 김홍덕

나오미가 찾아온 하나님의 은혜, 룻의 안식은 보아스가 모두 가지고 있었다.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이삭줍기를 허락할 땅과 곡식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후사를 이어줄 책임을 가진 친족이었다. 따라서 룻에서 보아스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사람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의가 없는 모든 인생은 남편 없는 여자와 같은데 그런 인생에게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해주시고, 그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의를 알고 그것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존재, 곧 아들로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로 산다는 것은 아들을 낳은 것, 아들로 거듭난 삶을 산다는 의미이다.


그런 보아스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런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잠을 청하며, 곡식이 많으므로 기뻐서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의도하신 대로 열매가 많이 맺혔음을 즐거워하고, 그 자리에서 쉬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타작마당은 곡식을 최종적으로 얻는 자리이니 그 자리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의도대로 열매를 얻었음에 즐거워하고, 그곳에서 잔다는 것은 열매가 얻어질 때 안식하신다는 말씀이다.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가 어디에서 잘 것인지를 알아보고 그곳에 먼저 가서 있으라고 했을 때 룻이 타작마당 노적가리(곡식 쌓아 두는 곳)에 갔다는 것은 룻이 보니 보아스가 열매를 얻은 자리에서 안식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어디서 하나님과 안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고 안식하셨다고 하신 것도 궤를 같이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사람이 나왔다는 것이나, 하나님의 뜻하신 열매가 나왔다는 것은 둘 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즐거워하시고, 그것에 취하시며, 그것을 인하여 안식하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곡식과 열매가 되었을 때 즐거워하시고 안식하신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가 뜻(이것을 로고스라고 한다.)대로 되었다는 의미다. 사람이 세상에서 취한 기준으로 평안하고 세상에서 잘 되어서 교회에 헌금 많이 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을 인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에게 만족되니 하나님께서도 만족하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기쁘니 하나님도 기뻐하시라는 압박이나 착각이지 하나님께서 그것에 안식하실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가지셨다면 세상 최고의 멸망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작마당이라는 것을 곡식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의 자리일 수 있다. 엄청난 충격을 가해서 그 껍질을 까부는 곳이 타작마당이다. 이는 곡식의 껍질을 벗기는 자리이다. 이것은 할례를 받는 것과 같고, 십자가에서 육신이 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껍질 있는 곡식은 최종적인 열매가 아니듯, 하나님 앞에 사람도 그 육신이 깨어져서 물과 피가 나올 때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깨어지듯 소비되는 도구요 벗어야 할 껍질이라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 껍질, 곧 육신이 평안하고 보존되고 적게 사용하면서 교회가 바라는 것을 많이 할 수 있는 세상적인 능력을 가지는 것을 복이라 여긴다.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로 껍질이 덜 깨어지고 보존될수록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넓은 길을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반대된 생각이다. 진정한 곡식은 껍질이 타작마당에서 벗겨지듯 인생에게 주신 껍질인 육신은 하나님의 의와 같은 알곡 같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깨어지고 소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삶이 그랬듯이.


그런데 룻은 모든 사람들이 육신이 평안한 자리에 하나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보아스는 타작마당에 거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화려한 곳에서 거룩하다 자칭하는 좋은 예복을 입고 평안한 모습을 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될 것이라 생각한 유대인들과 반대로 곡식의 껍질과 같은 육신이 깨어지는 그 자리에 물과 피, 곧 말씀과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보아스는 그 룻을 진정 정숙한 여인으로 여겼다. 남자의 허락도 없이 이불 속에 들어온 여자인데도 정숙하다고 한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와 같이 불의한 듯 하나 칭찬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선한 것으로 보시고 은혜를 주시는지를 보아스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이다. 육신 가진 삶을 소비하므로 육신의 쇠약해지는 세월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곡식이 껍질을 벗기 위하여 타작마당에서 내려 쳐지듯,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물과 피)을 십자가에서 쏟으심과 같이 살아야 함을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자리에 거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시며, 그것에 취하시고, 그 자리에서 안식하심을 보아스가 보여주고, 룻은 그것을 알았기에 정숙하다는 칭찬을 듣고 결국 아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