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을 줍기는 레위기 19장(9-10절)에 나오는 규례로 밭의 가장자리에 있는 곡식과 추수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이삭을 밭의 주인이 취하지 말고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를 위하여 남겨두라고 명하신 것이다. 이는 포도도 마찬가지였는데 유대인들은 포도를 한 번만 수확하고 남은 것은 동일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남겨 두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성경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말씀하시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 가난은 육신의 가난으로 비유된 영적인 가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룻이 이삭을 줍고 있다는 것은 나오미가 바랬던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고 남은 것을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보아스는 단지 이삭에 그치지 않고 룻을 위하여 오히려 곡식 단에서 일부러 곡식을 뽑아 룻이 쉽게 주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는 룻을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주인의 것을 함께 먹는 사람으로 받아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보아스와 룻의 관계는 예수님의 행적에서 두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는 길에 자신의 혈루증을 고치려 몰래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여인과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찾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이다.


혈루증이란 여성이 생리를 그치지 않고 계속 하혈을 하는 병을 가르킨다. 성경에 이 특이한 병을 가진 여인이 등장한 것은 혈루증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여인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모습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여인이 그 병을 고치려고 했다는 것은 물론 병이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여자로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을 고치려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9장, 눅 8장, 막 5장) 이는 남편이 없는 룻의 모습과 같은 처지이다. 남편이 없는 것이나 혈루증이나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수 없는, 하나님 아들로 거듭날 수 없는 생명의 상태라는 것에서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혈루증을 고쳐 주시고 더불어 평안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하는 간절함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구하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찾아 온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자녀부터 먹이는 것이지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신 것과 비교된다. 그때 예수님을 찾아온 룻과 같은 이방 여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답하므로서 예수님께서 그 딸을 고쳐 주신 사건이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다.(참고로 예수님께서 믿음을 크게 칭찬하신 것은 수로보니게 여인과 종을 고치려한 백부장 두 사람이 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바리새인이나 제사장 아닌 사람에게 거의 유일하다시피 은혜 구한 사람을 희롱에 가깝게 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신 백부장도, 그 종을 보러 가시겠다는 예수님께 말씀만 하시면 된다고 한 것을 인함이었다. 자신도 아랫사람이 있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온다면서. 예수님의 권세와 그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인정하고 순종하는 그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최고의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보아스의 밭에 남아 있는 이삭을 룻이 줍는 것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것을 개가 먹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족이지만 혼혈인 사마리아인을 대하는 것에서도, 심지어 복음조차 이방인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해서 바울 사도를 무시했던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뿌리 깊은 생각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이 ‘하나님의 의’라는 남편을 찾아서 온 그 마음에 남은 것이 아니라 곡식단의 이삭을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 보아스의 모습은 혈루증을 고치기 원하는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룻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순전히 인정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룻과 수로보니게 여인, 룻과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관계를 추출하고 비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지 못한 모든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인생들이 룻과 수로보니게 여인과 혈루증 앓던 여인과 같은 모습인 것을 깨닫고 그들이 보아스와 예수님 앞에서 보인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간절함이 마음에 있으면 그 사람은 성경을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서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룻의 성실이 보아스의 은혜를 이끈 것이 아니라, 보아스가 베푼 은혜는 곧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므로 시모를 따라 나선 룻의 순종과 믿음과 마음이 룻의 성실로 표현되었음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그와 같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법을 안다는 것이고, 생명의 법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안목을 가질 때만 알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즉 이 룻기를 보면서, 또 다른 성경을 보면서 룻의 행사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임이 보이지 않고, 룻이 성실히 행동하므로 보아스가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보인다면 마차가 말을 끄는 것과 같이 순서가 바뀐 안목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므로 거듭난 생명이라 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에서 신앙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하는 것임을 룻기를 비롯한 모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의 생명만 있으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임이 자기 안에 없다면 거듭난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으로 났는데 그 본성으로 사는 것을 금할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건 그리스도로 나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거듭나지 않았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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