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 가진 인생을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해보니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대책으로 성경을 몸으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을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로 보지 않으면 아담을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연구하듯 비판하는 것을 성경공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선악과의 사건은 분명히 오늘날의 이야기다. 오늘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과를 먹은 존재로 살아간다. 생활에서 마주하는 일과 사람 그리고 상황을 늘 선과 악으로 판단한다. 예를 들어 물컵을 쏟아서 옷이 젖는 것과 같은 일상의 일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께 뭔가 잘 못해서 그런 것인가?’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 악한 일을 당하지도, 행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무엇을 노력할 것인지 성경을 가이드로 삼는다.


특히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아니라고 착각 아니 거의 최면을 건다. 이는 신학의 영향이 지분이 크다. 성경을 공부라는 행위로 알아가려는 노력의 산물은 결국 행위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상식인데 이 상식을 가리고 신학을 거룩히 치장하고 그 산물들이 신약에 있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을 행위로 좇는 것은 거리낌없이 복음적 생활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약성경의 말씀도 행위로 지키려 하면 율법이 되고 복음도 Have to가되면 율법이 된다.


그러나 이것도 엄연히 아담이 부끄러움을 가린 무화과 나뭇잎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으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면 이단시하고 터부시 한다. 이는 다분히 성경을 기반으로 둔 많은 이단들을 인함이 크다. 하지만 자신이 예수다 혹은 하나님이나 신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은 예수님의 권세나, 능력이나, 지위를 도용한 것이지 예수님의 생명이나 정체성, 십자가를 지신 본성을 기반으로 자신을 예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차이는 근원이 다른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동일한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 이것이라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경건한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믿고 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신앙의 실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온전하다면 노력할 필요가 있는지를.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자신이 부족하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기에 그것을 메우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즉 끊임없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잎이 마르면 또 따서 치마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양의 가죽으로 옷을 해 주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구속이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오늘도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은 잎으로는 “예수님의 구속을 믿노라.” 말하지만 실상은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끊임없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예수님과 같지 않은 자신을 메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육신을 부끄럽게 보는 것


즉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육신을 보는 것과 같은 관점을 가진 존재이며,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부끄럽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며, 판단했다는 것은 스스로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었고 아직 그 문제를 벗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율법주의 신앙이지만 자신들이 사는 달력의 시대가 예수님 오신 이후의 세월을 살기 때문에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는 신앙을 복음신앙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성경을 모른다는 부끄러움에서 시작한 공부라는 행위의 산출물인 신학이 이를 붙들고 있어서 더울 그렇다. 그러나 간첩이 대한민국에 산다고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 듯이, 자신의 존재가 율법적인 존재이고, 자신이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노력해야 한다는 신앙에 있는 사람이라면 주후 30,000년이 지난 시대를 살아도 그의 신앙은 율법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고서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그것을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는 말씀은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면서 정작 자신은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것은 부끄럽고 만회해야 할 문제이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대로 살고, 율법신앙의 본질인 신학을 신봉하는 목사들의 말을 지켜내려고 하고 있는 신앙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이다. 즉 육신을 부정하게, 부끄럽게 보는 안목이 만들어낸 신앙이 바로 율법주의인 것이다. 율법주의는 선악과를 먹고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육신의 삶을 부정하게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육신을 부정하게 본 자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만회하고자 한다. 육신에 만족하지 못하니 육신의 삶을 고난이라 여길 수밖에 없고, 삶을 고난으로 여기니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니 무슨 선한 것을 행하여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고 이윽고 자신이 먹은 선악과가 주는 가치관대로 자신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근본 동력이다. 그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이생에서의 삶이 온전해지고 의로워지는 것은 물론 죽어서도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그것을 지켜 행하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우리가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오늘날 유대교라는 종교를 지키는 사람들이나 구약성경대로 하는 것이나 하나님과 무관한 행동으로 의로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 율법주의지만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율법주의는 오히려 하나님과 무관한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행위로 말씀을 지키는 것에 더 노하신다. 그것은 간음한 것과 같이 혼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을 더 진노하게 하는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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