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 안에서 보면 율법주의는 전통적인 이단 혹은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는 신앙이라면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 새롭게 자리한 이단을 말한다. 이 영지주의는 신약성경 후반부를 기록한 사도들, 요한과 유다 그리고 야고보와 같은 사도들이 많이 언급하였다. 이는 다소간 사도들의 사역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는 상대적으로 영지주의보다는 이방인의 신앙과 철학 곧 세상의 가치가 복음과 간음하는 것에 대하여 많이 경계하였다면, 이스라엘 내의 교회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비중이 높았던 사도들은 영지주의에 대하여 많이 경계하였다.


이는 영지주의라는 것이 쉽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에 있어 육신과 영혼을 따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육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영지주의의 기반인 것이다. 그래서 이에서 파생되거나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잠깐 기절하신 것이라고 하거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파생되었고, 이는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 갔던 것이다.


영지주의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영지주의는 어느 시대에만 반짝한 시대적 신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자신들은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고 단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거룩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본질적인 영지주의다. 다시 말해서 영지주의는 역사 속 한 시대의 신앙이 아니라 오늘도 현존하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도들의 때 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칭 정통이라는 신앙에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잠깐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관점이다. 즉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해 온 두 번째 관점은 육신을 부끄럽게 보고, 감추어야 하며, 육신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두려운 것이라고 판단하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가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육신이 정하고 온전하면 굳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소망을 좇을 때 육신을 배제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신앙


따라서 영지주의도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에서는 율법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즉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나 모두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두 번째 관점에서 비롯된 신앙이고 사상인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육신을 부정하게 보기에 그것을 만회하려고 성경을 지키려는 것이나, 육신은 어떻게 해도 항상 부정하니 이것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육신을 가진 사람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둘 다 같은 뿌리에 있고, 둘 다 선악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둘은 같지만 약간의 색깔 차이를 보이는 것은 영지주의는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상이라는 것을 보이셨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을 수 있을지를 비교하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니 할 수 없음을 인하여 예수님과 자신의 육신을 다른 것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이는 엄연히 육신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그것도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실존이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형상인데 그것을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부정하게, 또 부끄럽고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존재로 단정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영지주의는 없어진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어이없게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 근간이 되어 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과 같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과 같은데 어떻게 예수님과 다른가?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우리가 예수님보다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까지 하셨는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님과 같이 온전하여 질 수 없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온전하여 질 수 없다는 것이다. 화를 내고 성욕이 일고 욕심에 매인 자신을 보니 부끄러워서 도저히 예수님과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참 겸손한 것 같은데, 사람의 육신을 그렇게 본다면 그런 육신을 만드신 하나님은 실패자요 온전하신 하나님이 아니요,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는 것까지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한 영지주의


사람들이 이렇듯 자신도 모르고 부인하고 있지만 영지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 그 이유는 육신을 자신들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먹은 선악과로 인하여 자신이 화를 내고 욕심과 정욕에 가득 찬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스스로 심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 간에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악과의 본성이다. 선악과를 먹었으니 그 본성이 내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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