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서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보는 것에 대한 하나님과 다른 관점들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해보면 선악과를 먹은 상태에서 육신을 바라보면 육신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선악에 대하여 판단하기 때문이다. 선악에 대한 판단이 이렇듯 사람의 육신을 부정하게 보게 된 것은 선악과를 먹은 동기에 있다. 아담과 하와를 꼬신 뱀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듣고서 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 보였다. 즉 선악과를 먹으면 과연 하나님과 같이 될 것과 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즉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니 육신으로서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아진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듯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 사람이 잘못된 안목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해보니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과 비교할 때 정말로 비교조차 안된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물론 그 인식은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한 그릇된 관점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어쨌든 어두움에 빠진 사람들로서는 자신들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 앞에 육신이 너무 부끄럽고 부족하다는 것에 대하여 원인을 생각치 않고 어둡고 하나님에게서 떠난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돛단배 안에서 자기가 돛에 부채질을 하여 배를 움직이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그런 어리석음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한 것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것으로 온전히 가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은 물론이고 많은 사도들이 율법의 한계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율법, 즉 사람이 스스로 생각한 법과 그 법에서 파생된 생각인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그 관점에서 시작한 그 어떤 것도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사람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족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육신을 정하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한 신약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만족과 안식과 평안이 없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상식이다. 그런데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치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사람의 문제이고 문제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문제 해결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한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삶이 만족이 되고 평안하기를 위하여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련하거나 금욕적인 생활을 하려고 한다. 신부나 수녀가 되고 속세를 떠난다며 중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노력들을 오히려 비겁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마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라 여긴다. 그런 노력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그 피나는 노력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그것이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된다. 하나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안 될 것 같으니 포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 각각으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육신 가진 인생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면서 노력은 끊임없이 한다.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그 둘을 혼합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다르게 육신을 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온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신앙의 실체이다.


그러나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신앙의 절대적인 문제는 어쩌면 다른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자기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오히려 신앙의 경건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생들은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그래야 경건한 것이라고 최면에 빠져 있는 것이다.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만약에 개를 구원하실 것이었다면 개로 오셨을 것이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상, 구원의 대상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그 존재와 같은 형식인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를 보이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고 있으니 그것은 육신으로 오신 이의 뜻과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의 육신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육신 가진 자기 삶을 부정하게 봄을 인하여 이를 만회하려고 말씀을 지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완성하는 것이다. 육신의 삶이 말씀 그 자체가 되면 그것보다 더 온전하게 말씀을 지키는 삶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말씀 자체인데 말씀을 지키려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숨만 쉬어도, 말만 해도 다 말씀을 이룬 것이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육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약속하신 이 놀라운 것을 보이시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정작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고서 오히려 어둡게 되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의 의미를 모른 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부끄러움을 가리듯 성경을 지켜서 의로워지려 하고, 흙을 짓이기고 불에 구워 벽돌을 만들 듯 자신을 단련하고 금욕적인 노력을 쌓아 하늘에 오르려는 바벨탑을 쌓고, 이것저것 해도 안 되니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단지 할 수 있는 노력이나 하자는 식으로 주저 앉아 있는 것이 인생의 모습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흑암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도 보이셨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음을 아시고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육신을 부정하게 봄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구속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창조하실 때 세우신 뜻대로 사람이 회복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마저도 사람이 먹은 선악과로 인한 벌을 아들에게 내리심으로 사람들을 구속했다고 생각한다. ‘죄는 사람이, 벌은 예수님이’ 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을 소비하여 육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말씀하시려 오신 분이다. 


그래서 육신으로 오셨고, 육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육신 안에 물과 피 곧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옥합이 깨어져 향기가 나듯 드러내신 것이다. 육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라는 것이다. 육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이 평안하고, 복락을 누리며, 육신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을 완벽하게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십자가에 육신이 달리심으로 완전히 보이신 것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하나님과 같이 될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육신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육신이 하나님에 미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고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오히려 육신은 그렇게 신이나 천사에 비해 턱없이 연약하기에 오히려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쉽게 드러나는 온전한 존재라는 것임을 보이셨다. 사람의 연약함, 육신의 능력이 하나님께 미치지 못하여 선악과를 먹은 눈으로 보면 부끄러운 그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기에 가장 온전한 상태라고 생각하셨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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