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곧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벗어난 안목으로 육신을 보게 되었다. 그 관점은 육신을 부끄럽게 보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육신으로 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다. 하나님 앞에 육신을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이 육신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한 것이고, 이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죽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웃기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육신이 달라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육신이 부끄럽다고 여긴 아담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육신을 가렸다고 했다. 그리고 숨었다. 하와가 부끄러워 몸을 가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선악과 이전에도 둘이 같이 벌거 벗고 있었고, 이후에 둘 사이에 아들들이 태어나는 것으로 볼 때 벗은 것이 부끄러운 관계라고 할 수 없다. 이들이 육신을 가린 것은 서로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육신을 가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을 하나님께 숨기려는 어리석음이 오히려 마땅히 할 바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리석다고 하시는 뿌리가 여기 있다.


감추고자 한 것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육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감추려 한 것


그렇다면 왜 무화과 나뭇잎인가? 몸을 가릴 목적이라면 잎이 더 큰 것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손바닥 만한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렸는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성경이 이런 비상식적인 것을 서술했을 때는 그 표현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죽자는 이야기가 아니듯이.) 그것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신체를 가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추고 싶은 것은 육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다는 것을 가리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무엇인가를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경이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화과 나뭇잎은 식물 무화과 나무의 잎이 아니라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하여 성경을 행위로 지키려 노력하는 신앙인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은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생각에 성경을 행위로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신앙 그 자체



무화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의 나라 나무다. 이스라엘의 나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요 1:48)고 하신 것도 궤를 같이 한다. 나다나엘이 무화과 아래 즉 율법을 지키는 것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의미다. 또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아직 열매 맺힐 때가 아님에도 저주하신 것(마 21:18-22)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풍성하지만 그 열매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에서도 무화과 나뭇잎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을 의미한다. 오늘날도 개신교를 포함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종파에서 성경을 지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곧 무화과 나뭇잎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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