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십자가를 지신 낯선 예수 그리스도는 어쩌면 오늘 우리 신앙 여정에서도 반드시 만나야 하는 분일지 모른다. 아니 그렇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는 듯이 쉽게 말하고 또 쉽게 자신은 그 예수님을 인하여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건이 완결된 성경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지 자신이 그 과정을 다 거쳐 내었기 때문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되어 처형된 분이 자신의 구세주라고 믿는 것이다. 성공과 평안을 가치로 여기는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어떤 형태로도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구세주가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분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구세주로,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평안을 얻고 성공하는 것이 자신의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살 동안 평안하기를 구하고, 또 육신으로 도모하는 일의 성공을 도와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이 정상이냐의 문제가 있다. 양심과 상식 그리고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특히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죄는 예수님께 세상에서 이긴 것을 선과 하나님 은혜로 아는 가치로 볼 때 예수님은 미달이었기 때문인데 그 예수님께 자기 육신의 삶의 평안과 성공을 구한다는 것은 지극히 파렴치한 짓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과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안과 성공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가치를 얻는 것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믿음이다. 이 믿음을 가졌다면 육신의 수고스러움과 가난으로 인한 불편, 피라미드 꼭대기가 선이라는 세상의 가치 앞에 초라해진 자신을 서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인하여 서럽고, 그 자리에서 구원 받는 것을 구원의 문제나 예수 믿는 대가로 여기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니다. 이것을 더 냉정하게 말한다면 세상 가치를 가지지 못한 서러움을 벗고 싶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하나님께 기대한다는 것은 구원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구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좇는 세계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세계로 세계가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로 보면 천지창조의 사건이고, 복음으로 보면 거듭난 것이다. 세계가 바뀐다는 것은 물리적 세계가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여상한 세상을 살지만 전혀 다르게 인식하므로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생명이 바뀌는 것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성경의 대 명제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곤고한 것으로 여기며, 어떻게 하면 오늘보다 더 나은 육신의 삶을 누릴 것인지를 고민하고, 그 괴로움에 겨워 자신이 부유하지도 평안하지도 않은 이유를 가까운 사람의 탓으로 원망하는 삶을 살면서 그 괴로움을 위로해 주시기를,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삶을 바꾸어 주시기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커녕 오히려 욕보이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인 것이다. 당연히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구원이 있을 리는 없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문제나 종교적 범주의 사안이 아니다. 이것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자기 삶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육신으로 겪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법 안에서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준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곤고함은 단지 존재가 목적을 위하여 소비되는 과정의 열화일 뿐 죄도 아니고, 벌은 더더욱 아니다. 당연히 벗어나야 할 구원이 필요한 자리도 아니다. 이러한 인식과 순종이 자기 안에서 도저히 멈춰지지 않을 때 비로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구원이 무엇에 대한 어떤 구원인지 생각지도 않고 성급하게 자기가 벗어나고 싶은 문제나 자기 힘으로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것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천국 입성과 같은 것을 이루어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어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생각하실 때는 사람이 처한 어떤 상태에서 사람을 구하신다는 분명한 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생각 있는 존재로만 인식해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게 보면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는 하나님이 아시고 준비하신다고 하셨으니 그것이 부족하여 겪는 문제는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다. 그리고 천국이야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니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산다면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거할 것이니 따로 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쉽게 자기의 것인 양 생각할 것이 아니다. 자신이 정말로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께 찾고 있는지, 자신이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반대급부로 육신의 정욕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할 일이다. 그런 신앙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란 육신 가진 존재를 만드시고 그 안에 거하시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함이고, 그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성품은 육신을 드려 서로를 높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고, 서로를 높이려면 자신이 낮아져서 종과 같이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생명으로 나서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고, 성령이 생명으로 잉태케 하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양심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높아지는 그리스도를 좇아서 그 힘을 의지하여 자신도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본성으로 거듭나서 그러지 않으려 해도 낮아지는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말이다. 그 본성이 없다면 그것은 당연히 구원이 없는 것이고, 그것을 찾지 않는다면 소망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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