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기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겠지만 그들이 믿는 믿음의 실체와 무관하게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정해놓으셨다. 그것은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가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그 생명이 가진 본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가지신 뜻이자 사람을 향한 의와 말씀이 한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고, 그 사람이 그 거듭난 생명으로 사는 모습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그 본성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아들이 가진 생명의 정체성이 바로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되었기에 그 본성대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과 같이 육신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해결해 주실 것은 믿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이 아니라면 그 믿음을 지탱하는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려는 신앙생활이라 사칭한 노력이나, 죽어서는 천국에 갈 것이라는 신기루 같은 소망은 다 부질없다. 믿음이 바르지 않는데 그에 연관된 것이 의미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모하는 성경대로 사는 삶이라는 것의 실체는 자신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람 곧 하나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곰은 사람이 되려고 마늘을 먹는 수고를 했지만 사람은 그냥 날 때부터 사람이라서 그런 노력이 필요 없는 것과 같다. 당연히 신화니까 그렇다 인정해 주는 것이지 곰이 이 세상의 모든 마늘을 먹어도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성경을 모두 지켜낸다고 해도 소용없는 짓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어차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값이라면 그냥 세상 가치로 즐기는 것이 불쌍함이나 덜할지 모른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사과 열매가 사과 안에 있듯, 사람으로 난 아기가 사람 안에 있는 것과 같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니 그는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의 삶이 성경이 되는 법이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다. 사람으로 난 사람의 모든 삶이 사람의 일인 것과 같다. 이것은 분명히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낯선 이야기가나 현실성 없는 이론이나 유토피아적인 낭설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 낯설음은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과 자신이 같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죄다. 만약 그 죄를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면 사람이 성경을 모두 지키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복음이 되겠지만, 허무맹랑한 소리라 치부하고 시비를 걸자고 들면 그 인생은 헛된 것이다. 예수님처럼 되지도 못할 신앙을 가졌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될 것도 아니며,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나서 그 삶이 성경이 된 예수님처럼 살 것도 아닌데 예수 믿는다는 것이야 말로 허무맹랑한 일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려면 하나님의 아들로 나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김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다. 바로 그 하나님의 생각이 육신이 된 분이 예수님이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아들로 여기며, 어떤 정체성을 생명으로 여기시는지 예수님을 통해 보이셨다. 그런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와 전혀 다르게 낮아지고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9:7)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다른 생명 본성을 가진 존재이므로 하나님 아들이 아니다. 즉 구원 같은 것은 그 삶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이신 또한 우리 본성이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는 낮아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행동으로 지은 죄의 벌을 대신 받을 목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낮아지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사명감이 아니라 본성에 이끌리신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의 아들이 낮아지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것이 세상에 없으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안목은 인간 이상의 신, 그것도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모든 사람보다 높은 권세 높은 자리 높은 대우를 받는 월등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세상의 진리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시니 사람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대부분은 조롱하고 심지어 때리고 못 박았다. 심지어 자신들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죄인과 먹고 마시는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진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은 낯설었다. 하물며 오늘날 사람들일까?

 

오늘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심지어 자신이 그렇다고 착각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거짓이라는 증거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이 낯설지 않고 익숙하다는 것은 그들이 낮아지는 것이 창조주가 나타내고자 하시는 본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런 것은 세상에 없었고, 낮아지는 낯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의 말씀과 모습이 심령에서 성령을 인하여 생명으로 잉태되기 전까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행여 자신이 그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많을까봐 늘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세상 가치로 높은 것을 간구하는 신앙은 낮아지는 것이 생명이 된 사람이 아님을 함께 강조했다. 그런 착각은 인생을, 영혼을 망친다.

 

다시 한 번 당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라면 스스로 높아지는 것을 의로 삼고 그렇게 되려고 해도 되지 않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고 낮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되려고 해도 안 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 뿐 아니다.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그저 살 뿐인데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서 사는 것임을 성경이 증명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게 생명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세상에서 높아지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 주어질 수는 있지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 역시 그렇게 다짐하고 마음먹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인하여 욕심을 내보려 해도 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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