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헬라어다. 고대부터 사람의 직임 중에 높고 귀한 직임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어 그 직위를 부여했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히어로도 그에 해당된다. 그리고 육신의 여러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 속에서 구원해 주는 존재를 그리스도라 여기고 늘 그들의 도움을 앙망한다.

 

이와 같이 사람들 생각 속 그리스도는 자신이 벗어나고 싶은 문제 속에서 구해주는 구원자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필요한 상황은 구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문제는 어떤 상황을 구원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느냐다. 그것에 따라 구원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하나님과 사람의 인식이 다르다. 상황의 인식이 다르니 그리스도의 정의도 달라진다. 누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그리스도인지는 문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도움이 필요한 문제는 육신에 관한 것이다. 가난과 질병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상황에 따른 정치적인 문제와 같은 거시적이고 역사적 문제도 있고, 취업이라는 절박함, 개인의 건강과 사업 같은 개인별 문제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문제 해결을 구하는 것을 육신의 정욕에 쓰려고 구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런 것은 사람에게 어떻게 필요한지 이미 다 아시고 들풀도 먹이신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나 권위를 해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먹는 것, 입는 것과 같은 육신의 필요에 대해 알아서 하시는 분이다. 자기 목적을 위하여 만든 사람을 위해 준비도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4:3)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육신의 문제 해결을 구원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그리스도는 당연히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환호하던 사람들이 그랬다. 옥합을 깨어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모습을 보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들이 그랬다.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했던 사람들이 그랬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그랬다. 그리고 다르지만 성령이 오시기 전 제자들도 그랬다.

 

무엇보다 오늘날 아니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리스도가 바로 이 그리스도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사람들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천국에 가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그리스도도 이 그리스도다. 도대체 천국에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왜 필요한지 전혀 알 수 없는데도 그것을 소망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너무 분명한데 오늘날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기독교 계통의 모든 종교가 이 근간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에서 육신이 가진 가장 근본적 문제인 가난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소임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는데 교회나 성당이나 유사한 신앙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일을 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더 큰 문제까지 안고 있다.

 

신앙을 떠나 일반적인 상식만 가지고 생각해도 자신이 겪고 있고 벗어나고 싶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는 혹 믿었던 그리스도가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그 문제의 최고봉인 죽는 자리로 스스로 간다는데 그것도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된다는데 그 그리스도가 낯설지도 않고 용납하기 어렵지 않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생각없이 예수님을 믿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당연히 십자가를 지러 가겠다는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믿고 있는, 자기 육신의 문제 해결을 기대하고 구했던 그리스도가 아님에 당황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되는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구세주가 이해되지 않느냐다.

 

그것이 낯설지 않다면, 둘 중 하나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가룟 유다의 후예다. 특히 내가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니 가룟 유다처럼 종과 같이 취급하여 버린다면 희망이 없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신앙이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을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종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이들은 자신은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모든 어려움을 들어주리라 생각하겠지만 미안하게도 예수님을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도깨비 정도로 생각하는 이상 구원도 거듭남도 없다. 그 세계에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16:1-3)

 

이와 같이 육신의 문제 해결을 신앙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사실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을 얻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곧 문제의 해결이란 의미다. 그렇게 높고 이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그리스도는 항상 높은 곳에 있다. 성경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는 것도 높은 강대상에서 해야 한다 여기고, 신학이라는 이상한 학문의 세계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생각한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공부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인데 그 세계에서조차 높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이야기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말씀의 진실성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이다. 나사렛이라는 천한 동네에서 초라한 꼴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예수는 높은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도무지 그리스도가 아님에도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이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 가치관과 뿌리와 DNA가 같은 높아지려는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이기고 높아지고 평안하게 기도하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이런 외식과 기만은 제자 이후 모든 세대에서 항상 같은 모양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높이 있고, 세상에서 세상의 법과 가치에서 이긴 자를 그리스도라 여기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신학이나 세상의 성공이라는 경력이 없다면 그리스도에 모르는 것이라 일축한다. 그들의 심령에 있는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그리스도고 예수님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라고 한 그리스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