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 낯선 그리스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1. 27. 16:41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높아지는 그리스도를 언제나 구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믿고 신학으로 어떻게 정의하든지 그것과 무관하다는 말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 그것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이 아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증거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 땅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또 그리스도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문장을 믿는 것만으로 예수를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그 문장 하나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내어주는 엄청난 일로 바로 잡으려고 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과 일치 되었다고 믿는다는 것인가? 그리고 과연 타당한 생각인가?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구원을 쉽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이란 사람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존재 목적대로 회복되어 사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가장 쉽고 평안하며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다르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들을 그리스도로 보내서 그 가치관을 바로 잡아야할 정도 사람이 자기 목적을 회복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고, 나더러 주여, 주여 부르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심도 그것이다. 예수님이 쉽다고 하신 예수님의 짐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대로 사는 짐이기 때문에 쉬운 것이지, 그 과정은 십자가라는 엄청난 고통을 지나야만 했다.

 

예수님과 육신의 삶을 공유하며 직접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을 보면 이 문제가 쉬운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육신으로 마주하고 함께 했으며 인류 역사상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던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그런 과정 없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바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제자들의 낯설음을 필수적인 신앙 과정이나 관문이라고 표현하여야 하는지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낮아지는 예수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느냐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 누구도 낮아지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는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문장을 믿는 것만으로 사람이 낮아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고 순종하는 일은 없다.

 

이 격차와 간극,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기 전과 순종하고 믿는 그 간극이자 높아지는 세상의 가치를 좇다가 세상사람 모두가 멸시하는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는 그 사이 간극에는 절대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서 여러 장의 글로 설명한 <성령>이 그것이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 사람이 높아지는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세상 모두가 멸시하고 천대하는 낮아지는 것이 본성이 되는 법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사람이나 또 이런 글에 관심이 없는 사람 누구라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고 순종하는 과정에 아무 걸림이 없었고 그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육신으로 와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어서야 비로소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결론적 교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낮아지는 것이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는 없는 것이다.

 

양심만 있다면 자신이 낮아지는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자기 삶 안에 넘치고 넘친다. 그럼에도 그것을 시인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안데르센 동화일 뿐이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뭔가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 육신에 좋지 않은 일을 당할까 염려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것이라고는 자식의 성공과 사업의 성공과 가족과 자신의 건강이다? 그렇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성공과 평안은 세상 가치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자기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 그럼 에덴동산 곧 만족의 동산에서 쫓겨난 것이니 당연히 구원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고의로 낮아지려고 삶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본성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사울 왕이 맘대로 제사 드리는 것을 징계하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괜스레 수도생활 한다면서 자신을 학대하는 신부나 수녀나 중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의지로 낮아짐에 도전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징계의 대상일 뿐 아무런 신앙적 가치가 없다.

 

또한 낮아져야만 좋은 믿음이란 이야기도 아니다. 세상에서 사는 모양은 어떠해도 상관없음을 아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성령이 임하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중에는 제자들과 바울 그리고 초대교회 집사들과 같이 순교한 사람들도 있고, 빌레몬이나 루디아와 같이 부유한 사람도 있었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할례당이라는 것을 버리지 않은 유스도라는 사람도 있었고, 바울의 사역을 돕기 위해 삶을 헌신한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런 다양함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이자,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 삶이 어떻게 이끌리든지 순종하므로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자기 맘에 드는 것을 정하고 하나님께 그런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떼쓰고 노력하는 것 역시 자기 의지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목사나 선교사를 한다고 자신이 뜻을 정하고 그것을 간구하고 노력하는 것은 다 부질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징계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는 것이므로 거듭난 것이 아니다. 본성은 생명의 논리고 생명은 나는 것 이외에 존재하게 되는 법이 없다.

 

이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는 목사다 신부다 수녀다 혹은 예수 열심히 믿는 사람이라 칭함을 받을지 모르나 실상은 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본성이 자기 안에 없고,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까지 건너게 한 간극을 건넌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간극을 마주하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너무 낯설고, 자신이 사람으로 가지고 있었던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가치를 어찌할 줄 모르는 심각한 혼돈이 있고,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그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스스로 아무리 부인해도 할 수 없는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기억 속에는 낮아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말씀 앞에 정말로 어찌할 바 몰라서 죽을 만큼의 고민과 곤고함과 갈등의 세월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욥이 그랬고, 하박국과 같은 선지자가 그랬고, 바울 사도가 그랬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신 제자들이 그랬다. 그리고 오늘날도 그 선진들의 여정과 같은 삶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의 심령이 그렇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신이 세상에서 낮아지는 존재라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낯설고 어찌할 바 모르는 세월과 그 세월을 지나 성령께서 오셔서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솟아나는 것이 멈춰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은 거듭남과 구원이 없다는 말과 가깝다. 거듭났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 애쓸 이유도 없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그런 삶이 아니라면, 또 낯선 그리스도를 만난 적 없다. 그러면 당연히 낯선 그리스도, 낮아지는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할 것이다. 노력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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