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4:1-6 외인을 향한 지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3. 08:24 Writer : 김홍덕

지혜는 사람들이 가진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다. 지식은 사람의 삶의 형식에 관한 의문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지혜는 삶의 목적과 살아가는 이유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다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모였다.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학교나 학원을 가면 되지만, 왜 사는지를 알고, 또 지식을 통하여 익힌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즉 사람이 왜 하느냐를 아는 것과 밥 짖는 법을 아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지혜와 총명이 함께 하기를 구하였다.(골 1:9) 그리고는 어떤 것이 지혜인지, 즉 무엇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고 삶의 의미인지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끝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고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 모양인지를 말씀하였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상전에게 종에게 모두에게 또한 어떤 사람이라 해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의 삶의 모양이 어떠한지를 말씀한 것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기회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또한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외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대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외인들이란, 교회 밖에 곧 신앙 밖에 있는 이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것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별 것 아닌 일로, 또한 심지어는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신앙적 관점에서 무시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서는 대적할 대상으로 까지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은 지금도 만연한 생각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바울사도는 다르게 말씀하고 있다.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사람의 본질이자 내용이 <사람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됨으로 하나님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의를 잊고 형식에 몰입한 신앙을 율법주의라고 했고, 의만 인정하고 삶의 형식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을 영지주의라고 했는데, 율법주의자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지 않을 정도였다. 즉 외인을 대하는데 지혜는 물론이고 뭐 제대로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육신의 혈통 그 자체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즉 신앙적 인종차별이라고 할까 뭐 그러했다.


반면에 영지주의자, 곧 의만 있으면 되니 삶의 형식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오판을 한 사람들은 육신의 삶을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므로 외인들, 즉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죽어라 열심인 사회적 요구와 삶의 수고들을 외면하고 그저 하나님을 믿는 의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영지주의적인 관점은 이 시대에서 신앙적 순수성에 몰입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그러한 기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것들을 교리나 신앙의 모습으로 선택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조차 이단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이는 2014년 대한민국의 여름을 달구었던 유병언의 구원파가 바로 그런 것이다.


앞에서도 지속적으로 말해온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생명의 유전자가 본성으로 표현되듯 살아가는 내용과 본질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이 더 알지만, (신앙의 계시가) 더 밝지만 오히려 모르는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보여주심과 같이 사람을 대할 때 그렇게 살아가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나 영지주의와 같은 것은 생명이 본성이 되어 표현되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심겨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는 이 하나님의 법이 소실된 신앙인 것이다. 율법주의는 내용이 없고, 영지주의는 형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은 외인과 세상에 대하여 온전한 지혜,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의 존재 이유, 삶의 의문을 해결한 지혜가 없는 것이다.


외인에 대한 지혜는 결국 신앙 밖에 있는 사람이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사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지혜가 그 최종 단계이다. 지혜라는 것이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고 사람이 가진 가장 중대하고 크고 어려운 의문이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을 지혜로 대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 의문의 해답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 해답은 그리스도이신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곧 하나님의 의를 삶으로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용과 형식 중 어느 하나가 결여되고 훼손된 신앙으로는 의문을 해결할 지혜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의문이라는 것이 내용과 형식이 연결이 안 되고 그 고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생긴 의문인데 율법주의와 같이 내용이 결여되고, 영지주의와 같이 형식이 훼손된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여 삶의 의문을 해결하는 지혜를 보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외인들을 대하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의 교회가 정말로 잘 하지 못하는 문제일지 모른다. 특히나 한국교회는 더더욱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을 문자대로 보고 지키려 하는 신앙들은 형식이 좋아지면 신앙도 좋아질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교회를 화려하게 지어 하나님께 영광이 돌린다 하고, 반면에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사회 사람들이 볼 때 광신도 내지 이단같이 자신들만이 모여서 교회가 절과 같이 산속으로 또 외지로 떠나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려 하는 모양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련의 모습들은 외인들에게 지혜로 다가갈 수 없다. 그리고 외인들에게 지혜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내용이 되고, 삶이라는 형식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사람들에게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또 언제 찾아가도 평안히 자기 삶을 안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외인들을 지혜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교회의 문제 뿐 아니라 개인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씨가 없는 땅에 씨를 뿌리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전도라 하고 그 열매가 나오게 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신앙이 없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는 신앙이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다 그 자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고, 또한 그런 사람들이 신앙 가진 사람들로 인하여 감동하지 않는다면 또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꽃이라 이름을 부를 때 꽃이 되는 것처럼, 신앙 없는 사람이 신앙 가진 사람들을 보고 삶의 의문이 해결되는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되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의미가 있어지기를 바라셔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성품과 생명이 자신의 내용이요 본질이고 삶의 의미가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하나님을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심으로 하나님이 의미가 있어지셨는데,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화가에게 캔버스와 같은 것이다. 세상도 그러한 것이다.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표현한 증거를 세상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요 13) 이것이 바로 외인들을 지혜로 대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