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많이들 알고 있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이 <외모>는 사람의 어떤 부분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쁘고 잘 생겼다고 말하는 생김새에 관한 말씀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외모는 영어 단어로는 favoritism라는 단어로 그 의미는 '편애'라는 의미이다. 더 원어적인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번역하는 과정에서 편애의 기반은 외모라는 것이 충분히 반영된 말씀이라 생각이 된다.


이러한 것은 뒤 이어 4장에서 여러 동역자를 소개하면서 '유스도'라 하는 할례당에 속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에서도 이 외모라는 단어를 바울 사도는 편애와 상당히 연관을 지어서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할례당이라고 하면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이 복음에 대한 바울의 동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을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게다가 이 말씀, 외모에 관한 말씀은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는다.'는 말씀에 이어서 하신 말씀으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악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외모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 안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그 사람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그 사람의 본 모습이 아니라 그를 그렇게 살게 하는 그 사람의 속을 봐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어느 날 지하철에 자기 아이로 보이는 어린 아이 세 명과 함께 탄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지하철에 탄 아이들은 마치 놀이터인양 객차 내에서 떠들고 놀고 있는데도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자, 보다 못한 한 사람이 그 남자에게 아이들이 당신 아이냐고 물었고 그제야 그 남자는 깊은 생각에서 깬 듯 주위를 둘러보고선 아이들을 불러서 조용히 시키고는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방금 이 아이들의 엄마가 병원에서 죽어서 장례 준비하러 집에 가는 길인데 이제 어떻게 살아가나 막막하여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라고.


 이렇듯 사람의 속과 속사정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고 하니 사람의 직업이나 재산의 정도와 같은 것을 보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인 것이다.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그 단편적인 것 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교회에서도 그렇다는 것이 더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런 의미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말씀도 어떤 행동강령을 열거하듯이 하나, 둘 이렇게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고 있는 말씀이다. 그 시작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떠함에서 시작된 말씀이다. 물론 그 보다 더 먼저는 복음에 철학이나 과학과 같은 것이 더해져야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같은 직분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생각을 경계하고자 하는 골로새서의 주제가 있다.


이런 일련의 말씀들은 이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깊은 연관이 있다. 우선은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은 세상의 초등학문이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부분은 사람의 외모에 속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골로새 교회 안에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의 교훈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에 능통하나 복음의 본질을 알지 못해 그것을 혼합하여 화려한 말로 사람을 유혹하는 사람과 그를 따르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보는 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의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는 사람은 필시 사람을 꾸짖으려 하고 교훈하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표현된 것으로 그 사람의 속을 가늠하는 생명과는 반대되는 방향성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외모로 보는 본질적인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49-53)


이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 믿는 것을 가지고 사람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안 믿는 집안에서 신앙 문제로 다투거나, 또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살아가는 모양을 보고 뒤에서 수근 거리면서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는 그런 모습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이유가 있다. 예수도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제어하려 하는 마귀와 같은 짓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안 믿는 사람과 다투는 것이고, 교회에서도 더 우월한 안목을 가지고 목회를 해 가고 있는데 자신 만큼 보지 못하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목회에 방해되고 교회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거나 잘 몰라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던지신 불이나 칼은 능동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던지신 불과 칼은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것 그것이었다. 십가아에 달리신 그 모습을 볼 때 보는 사람의 마음이 칼에 찢어지는 것 같고, 불타는 것 같아지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너무 귀하고 전해야 하고 놀라운 것이고 대단한 것이라고 해서 능동적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갈등을 조성하는 것이 투철한 신앙이고 순교적인 신앙이고 순수한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울역 앞에서 시끄럽게 전도한다고 난리고, 교회가 사람을 버리고, 사회와 배타적인 관계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법은 오히려 정말로 말할 수 없는 놀랍고 귀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모습을 보이심으로 이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하셨고, 하나님의 뜻도 높이심으로 부할 승천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갈등을 조장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바로 이 예수님의 법으로 아내를, 남편을, 자녀를, 부모를, 상전을, 또 종을 대하면 어떤 관계와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생명을 가진 사람의 당연한 본능이라는 말씀의 근간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사람은 사람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는 사람은 사람을 심판하고 자신이 복음을 가졌다는 착각으로 자신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을, 사람의 본질과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골로새 교회의 문제와 같은 문제에 빠져들게 된다. 철학과 과학과 같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의 의와 그것을 결합하려 하고, 부부나 부자 관계와 같은 사람 관계 안에서도 어떤 것이라도 더 아는 것을 주장함으로 모르는 사람을 따라오게 하려고 모른다는 것을 심판하고 각성시키려 하며, 사람의 외모를 판단하여 그 속사람을 가늠하는 생명과는 반대방향의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학력이나 생김새나 재산의 많고 적음과 같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초보적인 관점에서 시작해서, 사람을 대하고 보는 것에 있어 언제나 더 알기에 죄인이 되고, 모르는 이가 그 속에서부터 밖으로 표현하는 생명의 방향성으로 이끄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죄는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하는 것이고, 참된 교육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알고 더 아는 사람은 자신보다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이 사람의 본질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육신이 있는 것이다. 그 육신으로 살아내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것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감동이 전해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며, 그렇게 살아내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려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산제사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십자가의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이 그 속에서부터 밖으로 생명을 표현해내는 그 방향성을 준수하는 것이다. 외모로 본다는 것은 거꾸로 사람의 외모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나 신앙을 가늠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악한 것이다. 악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과 다른 것을 옳다고 시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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