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를 향한 간구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라는 간구를 이어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TV에 나오는 연예인을 아는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또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렇게 아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다는 것은 봤다거나 들어봤다거나 하는 것으로 안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체험적인 것, 자기의 것이 된 것을 안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저 여자를 안다’하는 것은 잠자리를 같이 해 봤다 할 수 있을 정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내 안에 자리하게 된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 하신 분이며,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위해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를 지게 하셨으며,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다’와 같은 것을 지식으로 또 객관적 사실로 믿는 것이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이 내 안에 있어서, 그것이 내 생명과 정체성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는 간구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생명을 아는 것이고, 그 생명이 내 안에 하나가 된 것이기에, 생명의 자람 같이 <자라게>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바울 사도는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고’라고 하고 있다. 영광은 ‘표현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doxa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신다.’ 하셨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다 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능하심은, 사람이 세상을 살다 겪게 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문제는 궁극적으로 아무리 해결해도 결말은 다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표현하고자 하시는 본질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이 살다가 겪게 되는 육신의 문제에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적은 하나님의 몫이며, 인생 육신의 삶의 문제는 이미 자연 속에 있기에 우리를 그 안에 두신 것이며, 또한 위대함도 자연의 위대함에 사람이 미치지 못하니 이는 세상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은 이미 맘껏 표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력>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라나 표현(영광)되어진 것이 능력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 대하여 더 안다거나, 신학적 지식이 더 늘어난다거나, 신비한 능력이 더해진다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더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상들이 골로새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에 바울 사도께서 이 편지를 쓰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의와 목적을 잘 아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에게 덧씌워진 각양의 사회적 지위와 삶의 모양과 철학과 지식 등을 버리면 버릴수록 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바로 인간, 연약한 인간 그 자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연약함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사람을 지으셔서, 우리 인생이 날 때와 같이 하나님이 그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그 인간 본연의 모습 이외에 아무것도 부가되지 않은 인간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그것이 능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자기 나름의 선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가 선하다고 하는 것을 계속 덧입어 능력을 나타내려는 죄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선의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함으로 분쟁과 갈등 가운데 살고 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다. 언제나 심판이 있는 자리일 뿐이다. 그리고 다들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선악과의 관점이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든 자리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 능력이니, 그것이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일이기에 그것이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일이 가장 능력 있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정체성을 십자가에서 보이심으로 그 모습을 보고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될 때, 사람을 선악의 기준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 그대로로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영광의 힘을 좇은 능력인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이 바벨탑처럼 위대해지고 높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벌거벗겨지고, 세상 사람들이 사람에게 덧씌워지는 것이 선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그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생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광이며, 그 영광을 알게 되어 영광을 좇게 되어, 하나님 안에서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안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자라남으로 세상적인인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볼 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뜻이 세상적인으로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않고 고백함으로 자신도 그렇게 되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능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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