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9-12 빚과 기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2. 7. 23:02 Writer : 김홍덕

사도바울 사도는 우리가 빚진 자라 했다.(롬 8:12) 이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다 빚진 자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돈을 빌린 것도 아닌데 왜 빚진 자인가? 이것은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창조한 존재는 피조물에게 목적하는 바가 있고, 물건을 사는 사람은 그 물건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그 목적과 기대하는 바가 바로 <빚>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빚을 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으시다는 말씀이고, 빚진 자는 갚아야 하듯, 우리 인생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그 때에 두신 목적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죄>라는 말과 <빚>이라는 말은 거의 같은 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 나오는 죄는 영어로 sin이 아니라 debt이다. 즉 채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빚을 갚지 않는다는 것이 곧 죄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빚진 자가 그것을 갚지 않는다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빚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라면, 우리가 그 목적 아래 있지 않으면 바로 죄인이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다 죄인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요 12:46)

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사람들이 다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하심인데, 이는 빚진 자들이 빚을 갚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빚 갚는 것에 관하여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구속 곧 죄 사함이요 빚을 갚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 했다.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의(義)’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 성경으로 볼 때 구약시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역설적으로 성경말씀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그 안에 아직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은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큰 교회들이 하나같이 다 그렇다. 교회에 봉사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과 같은 것을 잘 할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친다는 것은 아직 율법의 세계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인 이유가 있다. 율법의 세계에 있다는 것은 빚에 대하여 갚아 나가는 종의 신앙의 세계에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종이라는 신분은 늘 공로로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기도를 더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잠깐 짚고 넘어 간다면, 그 존재가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기도 그 자체이다. 기도라는 것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기에,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으로 말미암았으므로 존재 자체가 기도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종은 늘 공로가 될 수 있는 일을 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빚이라는 것은 언제나 빚이다. 인생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율법을 지키는 것에 소비하는 종일뿐이다. (신약의 말씀도 행위로 지키려 하면 다 율법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빚이 우리의 기업이 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기업은 다른 말로 몫이요, 분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두신 그 목적이 우리의 본성이 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를 볼 때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또한 우리의 모습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 이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전쟁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생의 모습으로, 또한 우리가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죄인이기에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단번에 드려지는 제사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것을 볼 때, 그 사건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목적이 내 것이 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하며 사는 것이 종과 같이 행함에 있지 않고 아들과 같이 본성이 됨으로 인하여 아들이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듯, 아버지의 모든 것이 나의 몫이 되듯, 또한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의 분깃이 되듯 나의 것이 됨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이전에는 빚이었다가 십자가를 볼 때 자신의 모습이 그 모습임을 고백하는 그 하나만으로 이전에 빚이었던 것이 몫이요, 기업이요 분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속량이고 구원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골로새의 교인들에게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의 말씀은 이전에는 우리에게 빚이요 죄였던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이 됨으로 그 목적이 나의 본성이요, 분깃이요, 기업이요, 유산이요, 몫이 되게 하시는 그것을 감사드리기를 원한다는 것이니, 이는 성경의 모든 것이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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