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교가 되었던 그 안에는 일방적인 즐거움이나 무조건적인 긍정만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 어떤 일에든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다는 것은 이를 지으신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오래 참고 견딘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당연히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또한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선한 일>에 대하여 포스팅 할 때도 언급했지만, 선한 일 자체가 전부이면 그건 자기의 의로움일 뿐이라 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오래 참고 견디는 것도, 그러한 것 자체가 신앙이 있어 보이는 행동이라 여겨 참고 견딘다면 그것 그냥 공로주의 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크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골로새의 모든 형제들이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함에 있어 견딤과 오래 참음이 요구되는데 그러한 것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참고 견딘다는 것이 즐거운 일에 쓰는 표현은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일에 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 어려운 일인데 그것을 기쁨으로 한다는 것은 더더욱 사람에게 힘든 일임에 분명한 것임에도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그런 자리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하는 이유는 교회 안에 세상적인 철학과 과학이 결합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신앙에 철학과 과학이 가미된 사람이 더 좋은 신앙인으로 인정하려는 골로새 교회의 사람들에게 과학과 철학에 대한 지식은 비록 없지만 오히려 그것과 복음이 결합되지 않아야 함을 아는 에바브라가 전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떤 기쁨이 있기 때문에 이 기쁨으로 인해서 참음과 견딤이 가능하기에 바울 사도가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기쁨은 앞서 10절에서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연결된 것이다.


즉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바로 그 기쁨이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는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이르고 영광의 능력으로 열매 맺는 자리에 이르기를 바라는 바울의 소망이 기쁨으로 참고 견디는 것과 상관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 때도 많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선택함으로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의 정체성을 알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아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이 된다. 그 운명은 예수님께서 아무 죄가 없으시나 세상의 법에 의해서 죄인이 되신 그 운명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산다는 것은 사람 자체로는 성공도 구원도 없기에 끊임없이 사람을 업그레이드해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야한다는 세상의 법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산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은 어떤 분명한 목적 없이 또 기댈 곳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기댈 곳,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살아감으로 인하여 겪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세상을 이긴 이김인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가지시고 계신 사람을 향하신 근원되는 뜻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것이며, 그것이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며. 그런 삶을 살아 있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삶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삶이다.


그리고 생명은 또한 같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또 그 생명을 자라고 장성하게 하고 널리 퍼지도록 정말로 최선을 다한다. 그것은 비단 혈육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자기가 의롭다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이 있으면 누구라도 그것을 널리 알리려 하는데, 하물며 아들까지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의와 뜻과 생명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기쁨으로 참고 견딜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어쩌면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생명을 기르는 것이다. 자기의 자녀를 기르는 일에는 많은 수고와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을 참고 견딤으로 해 나가는 이유는 바로 <기쁨>이다. 또한 농부가 곡식을 기르는 것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기쁨으로>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한 것은 <생명을 기르는 수고를 온전히 감당하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선한 일에 열매 맺게 하시고 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열매는 생명 세계의 결과니까?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다. (욥기 38장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욥과 변론하시면서 당신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셨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근원이시며,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신 창조주이시다. 즉 기쁨으로 견디고 오래 참는다는 것은 생명을 기르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의 간구이며, 이는 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그 정체성이 동일한 세계로 이르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형제들을 위하여 하는 간구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지혜와 총명이 가득하게 되고,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 맺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고, 이렇게 연결된 모든 내용들을 하나로 연결해 볼 때, 이 모든 것은 생명 세계에 대한 표현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로 여기며, 밥 달라, 돈 달라, 좋은 여자 달라 기도하는 큰 교회들의 기도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의 간구인 것이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이르기를 원하는 자리에 대한 것에는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이 세상적인으로 성공함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믿게 되도록 그들의 세상적인 안위와 풍성을 간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큰 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가르침에도 일관성은 있다. 성경 어디를 읽어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라는 것에 수렴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 하면서……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큰 교회에서는 천국의 상급을 위하여 참으라고는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며 좀 억울하고 예수 믿는 것이 힘들어도 참으라고 한다. 그저 참는다는 것 그것이 선한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간첩이 정말 어려운 일을 견딘다고 해도, 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참는다면, 참으면 참을수록 죄가 되듯이, 하나님 앞에서도 왜 오래 참고 견뎌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그래야 하는지, 어떤 세계에 대하여 그래야 하는지 모르고 참고 견디는 것은 하면 할수록 죄가 되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모든 참음과 견딤은 하나님의 품성으로 거듭난 생명 안에서 그 생명이 또 분배되고 잉태되며, 그 생명이 또한 그렇게 되도록 하는 생명의 기쁨을 인하여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면 다 죄요, 참을수록 죄가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니 그 생명으로 인하여 아들 되는 신앙은 어쩌면 굳이 참으려 애쓰지 않아도 그 본성이 하나님을 닮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으로 살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바울 사도의 간구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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