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장 9절 이하에는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본격적인 권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 권면들의 핵심은 어쩌면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차차 포스트 하기로 하고, 지금 바울 사도의 권면에는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듣던 날로부터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형제들을 위하여 간구한 것이 있다고 시작하고 있다. 그 권면의 내용은 9절에 있는 대로 “너희로 하여금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고 간구하고 있다고 했다.


지혜와 총명은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이 입에 익숙한 조합이다. 단어의 뜻이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본질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표현의 형식이지만 그 표현을 한번 살펴본다면, 지혜라는 것은 보통 ‘소피아(Sophia)’를 그 어원이라고 본다. 또한 총명은 ‘쉬네시스(Sunesis)’가 그 어원이라고 본다.


지혜는 정적인 것이며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인과 관계를 밝히 아는 지식이라면, 총명은 동적인 것이며 변화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변환하여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람의 지혜와 총명 채워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그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과,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날 내 안에서 시대의 변화가 있다 해도 그것을 이해하고 변환해 가고 시대에 맞게 설명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구한다는 의미이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의 형제들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기를’이라고 간구한다고 했다. 신령하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신령하게 여기는 모든 세상의 지혜와 총명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 채워지기를 간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그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연결되고, 어떤 상황과 삶의 정황에서도 말씀과 함께 적용해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고 신앙 안에 의문, 즉 (Why?)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그렇게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가능한 세계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 확신한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하지만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사람들이 많은 의문에 있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골로새 형제들을 위했던 간구, 즉 ‘신비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 오늘날 큰 교회 목사들의 행보를 본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교인들을 위하여 바울과 같이 간구한다면, 적어도 자기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의문에 쌓여있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지 못한 것은, 알지만 그런 간구가 없거나 아니면 자기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후자일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자주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안보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그리고 만약 전자라면 그는 이단일 것이다. 이단의 가장 큰 특징은 뭐든지 교주만 알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만민을 위하셨던 것에 대립해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삶 속에서 신앙적 의문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뿐이다. 그것은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 믿음> 그것 하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다는 것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을 2,000년 전에 십자가 지셨던 그 예수님과 동격으로 격상시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것이 뭔가? 기름 부은 자요, 왕이요 제사장이며 선지자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뭔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사람이 어떻게 감히’, 더 사실적으로 말해서 “네가 뭔데 감히 ……”라며 그것을 부인한단 말인가? 그리고서 그곳을 교회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서 같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대 주제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창조의 모양도 하나님의 형상대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a Christ)로 살아야 한다.’ 라고 하면 말할 수 없는 거센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뭔가? 그게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듯 사람을 그리스도를 받는 것에 대하여 성경의 의도와 다르게 터부시 하고 또 염려하는 이유는 사람에 대한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된 원인은 <선악과> 때문이다.(선악과에 대하여는 다음에 포스팅하기로 하자) 사람들이 사람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그리스도의 기준은 그보다 더 높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그 생명이 다른 창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생기로 말미암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그리고 아담이 아무것도 입지 않고 창조되었을 최초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사람에게 기대가 너무 높다. 학력이 높아질수록 사람답고, 부와 지위와 고상함이 높을수록 지도자가 된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 보니 모든 인생의 희망인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면 더더욱 가치 있게 보여야 한다고 여긴다. 그것이 세상적인 가치인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그리고 이건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안목으로 성경을 볼 때는 모든 것이 의문일 뿐이다. 그렇게 되기가 너무 힘들고 몇몇 사람만이 1등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1등도 내일이면 바뀌는 세상에서 기대치 높은 사람이어야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너무 어렵기에 사람들에게 성경은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나약한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좋은 모습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적인인 가치인 돈과 명예와 고상함에 관하여 위대한 사람이라야 그리스도라 여기는 안목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안목 안에서는 성경이 무슨 말을 해도 의문에 쌓일 뿐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고 믿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지 위대해서가 아니지 않는가? 이것 하나만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성경은 죽은 의문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형제들에게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지혜와 총명이라는 옷 입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 아닌가?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로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하심이 아닌가?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간구하는 것 역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당시의 세상적인 철학과 과학을 장착한 사람이 사도나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전한 복음, 즉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한 그 믿음을 전한 에바브라를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 앞에 선 그리스도(a Christ)라고 전하며 그것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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